내가 뉴욕 JFK공항의 환승객 라운지에 감금(!)되었던 것은 서기 2000년 7월의 일이다. 미국을 방문할 의도는 맹세코 없었다. 다만 캐나다 벤쿠버까지 가는 직항 티켓을 구하지 못했고, 비행기의 경유지가 뉴욕이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미국 비자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까지 나는 공항이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라고 생각했다. 내키는 대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그곳이 유목(遊牧)의 공간인 줄만 알았다. 이것이 얼마나 오만하며 순진한 착각이었는지는 곧 드러났다.
서울 발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군청색 제복을 입은 공항 출입국 관리요원에게 인계되었다. 그들은 나를 ‘TWOV’(8시간 미만 경유자를 위한 한시적 미국비자. 9·11사건 이후 중단됨) 이용객이라고 불렀다. 벤쿠버 행 비행기의 탑승수속이 시작될 때까지 반나절 동안 내 옆에는 관리요원이 그림자처럼 붙어 따라다녔다. 화장실을 갈 때도, 공중전화를 이용할 때도 그는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내 움직임이 조금만 수상해 보이면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유리문 밖의 세상은, ‘진짜 미국’이었다. 아메리칸 드림? 내가 ‘드림’이라는 단어를 혐오한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호시탐탐 미국 입국의 기회를 노리는 제3세계 출신 ‘예비 밀입국자’일 뿐이었다.
<터미널>의 나보스키를 보면서, 잊고 있었던 JFK공항에서의 경험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내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제작관계자들은 한 순간도 미 입국 비자 따위에 구차해져본 적 없는 ‘선택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굴욕과 수치라는 단어를 아예 모르는 이들일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한 인간이 돈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24시간 CCTV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비인간적’인 것이다. 보통사람 같으면 어떻게든 탈출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나보스키는 영혼이 파괴되어 급속도로 피폐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기막힌 환경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성장한다. 나아가 따뜻한 인간애로 주변을 감화시키기까지 한다. 혹시 그의 고국 ‘크라코지아’는 천국의 다른 이름인가? 나보스키는, 하느님이 인간의 생존 한계조건을 실험하기 위해 특별히 출장 내려보낸 천사인가? 어쨌거나 이런저런 샛길이 열려도 그는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입국허락의 도장과 입국거부의 도장 사이에 도사린 판별의 이데올로기적 허위성에는 관심조차 없이, 오직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미국의 법과 아버지의 법 안에서, 그는 양순하고 성실한 맏아들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침내 그의 ‘살아있는’ 양아버지 미합중국은 그에게 하루동안의 특별 비자를 하사하였고, 나보스키는 ‘죽은’ 친아버지의 평생 소원을 풀어드리고야 말았다. 이 감동적인 인간승리에 대해, 눈물 한 방울도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