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골마을에 버스가 도착한다. 여자가 내리고 부랑자 차림의 사내가 그녀를 노려본다. 당장 무서운 일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지만 잠시 뒤 사내의 눈이 풀린다. 여자는 이 마을에 새로 부임한 교사. 마을 소년의 안내를 받으며 버스정류장에서 십리 떨어진 학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임권택 감독의 1982년작 <안개마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난 이 영화를 지난주 일요일 EBS <한국영화특선>에서 처음 봤다. 부끄러운 일이다. 영화잡지 기자 생활 10년을 하면서 이제야 <안개마을>을 보다니. 아무튼 꼭 보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닌데 영화는 그렇게 시작해서 단 한순간도 눈길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8월 <한국영화특선>은 <만다라> <족보> <깃발없는 기수> 등 임권택 감독의 걸작들로 이어진다. 놓치지 마시길).
그게 꼭 정윤희의 압도적인 미모 때문은 아니었다(그러나 정윤희는 정말 예쁘다). 마을 사람 모두가 친척 관계로 얽혀 있는 산골, 삼강오륜의 유교적 덕목에 매여 사는 사람들, 그들 사이에 성을 교환하는 기이한 시스템, 영화는 그런 이야기를 엮어 한국사회의 이중성을 그려내고 있었다. 20년도 지난 옛날 영화지만 <안개마을>은 무서운 영화였다. 호러 장르와 무관한데 그렇게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임권택 감독은 핏줄로 이어진 이 마을에 뒤틀리고 뭉그러진 기형의 이미지를 심어놓았다. 그리곤 거기서 탈출할 출구를 막아버렸다. 아무리 역겨워도 여기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숨이 막히고 소름이 돋았다.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고향이 그처럼 추한 것이었던가? 과거와 고향을 낭만과 향수로 덧칠하는 요즘 영화들에서 결코 볼 수 없는 것을 <안개마을>은 보여준다.
놀라운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영화를 찍는데 고작 20일 정도가 걸렸다는 사실이다. 영화방영에 이어진 임권택 감독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제작환경의 열악함에 관해 말했다. 1년에 4편을 만들어야 외화 쿼터를 딸 수 있던 시절, 한 편 찍는데 걸리는 시간에 절대적인 제약이 있었고 <안개마을>의 경우엔 더 심해서 20일 안에 끝내야 했다는 것이다. 제작과정이 궁금해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책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을 찾아보니, 실제 촬영은 12일 만에 끝냈고 일기가 나빠서 열흘 정도는 아예 찍을 엄두도 못 냈단다. 아무리 대부분 장면을 한 장소에서 찍었다지만 요즘 국내 영화계라면 불가능한 일이다(김기덕 감독만 예외다).
가끔 제작과정에서 겪은 이러저러한 고초에 대해 하소연하는 감독을 보게 된다. 듣다보면 정말 힘들었겠구나, 공감이 가고, 그래서 생긴 허점은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안개마을> 같은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면 요즘은 정말 영화찍기 좋은 환경이구나, 싶다. 제작비가 모자라서, 배우가 말을 안 들어서, 후반작업 기간이 짧아서, 뭐 그런 유의 말에 대해 그냥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비겁한 변명입니다”라고.
물론 최악의 상황에서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다고 모든 영화가 열악한 조건과 싸워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를 보노라면 조건이 훨씬 좋은데 결과는 왜 이러나 싶다. 만든 사람의 혼이 아니라 얼마나 벌까, 돈 세는 모습이 보이는 영화가 적지 않다. 한국영화 점유율 상승이라는 신기루 속에 혹시 지금 영화계는 무언가 잃어버린 게 아닌지. 그게 무엇이든 굉장히 중요한 것이 사라진 느낌이다.
마감 도중 정은임씨의 부고를 접했다.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을 함께했던 정성일씨는 ‘황망하다’고 말했다. 이번주 추모기사에 이어 다음주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정성일씨의 글을 실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