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의 무대는 JFK 공항이다. 미국의 심장인 뉴욕의 입구이자 출구이다. 영화 <터미널> 속의 거대한 공항은 부자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답게 100% 세트다. 세트는 세상과 격리된 소왕국이며 그곳에서 감독은 왕이 아니라 신이다. <터미널>의 공항에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은 오로지 감독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곳에 표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통제와 질서의 스펙터클이다. 그 스펙터클은 스필버그의 마음에 담긴 미국의 이미지다. 그 스펙터클은 웅장하고 화려하나 무언가 빠져있다. <터미널>의 이야기는 그곳에 없으나 스필버그가 보기에 반드시 있어야 할 그 무언가를 채워가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무언가의 현신이 영화의 주인공인 촌스럽고 가난한 이방인 나보스키(톰 행크스)다. 뉴욕으로 가기 위해 그곳에 내린 그는 비행하는 동안 조국 크라코지아에 쿠데타가 터져 비자가 무효화되면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샤를드골 공항에서 16년 동안 숙식을 해결해온 이란 남자의 실화에서 빌려온 이 주인공은 공항의 골칫거리에서 점차 공항 노동자들의 영웅으로 변신하며, 아름다운 여인 아멜리아(캐서린 제타 존스)의 마음까지 얻는다.
<터미널>은 <스미스씨 워싱톤 가다>로 대표되는 프랭크 카프라식 인민주의 코미디의 변주다. 얼굴 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거대한 기성 제도가 우연히 끼어든 한 ‘작은 남자’(little guy)에 의해 삽시간에 유쾌한 혼란에 빠지고 그는 민중의 영웅이 된다. <터미널>엔 가족주의에 대한 스필버그의 유아적인 집착이 남아있지만, 그 가족주의는 인민주의적 휴머니즘 혹은 민중들의 수평적 연대를 향해 열려있다. 이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도 공항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나보스키의 데이트를 응원하는 장면이다. 스필버그 영화가 사랑해온 ‘길 잃은 소년’이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고 있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엔 한 이방인으로부터 비롯된 아름다운 소동에도 불구하고 미국적 질서의 정화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며있다. <터미널>은 완벽한 인공성에도 불구하고, 부재한 것의 흔적이 있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