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정성일 평론가와 전찬일 평론가의 <엘리펀트> 찬반 논쟁
2004-09-08
글 : 송혜진 (객원기자)

“첫 장면을 보는 순간 걸작이라고 생각했다.”(정성일) “과대평가된 촌스런 작품에 불과하다.”(전찬일) 지난 8월24일 오후 8시20분. 하이퍼텍 나다에서 시작부터 팽팽한 찬반양론의 줄다리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2003년 칸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받았던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 이를 두고 입장을 달리하는 영화평론가 전찬일씨와 정성일씨가 만났다. 1시간 반가량 영화기자 오동진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 두 사람의 토론은 그 열띤 분위기와 거침없는 논쟁으로 관객의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흥미로운 논쟁의 현장을 지상중계한다.

윤리적으로 봐야하는 걸작 vs 칸 수상으로 과대평가

사회 먼저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기 전에 각자의 영화 <엘리펀트>에 대한 소감을 50자평처럼 들려줬으면 좋겠다.

전찬일 <엘리펀트>는 주목할 만한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철지난 60년대 유럽작가 스타일에 불과한 작품이다. 구스 반 산트가 초심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지만 상대적으로 과대평가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칸영화제에서 감독상과 황금종려상을 동시에 받았는데, 칸의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이 두 상을 동시에 거머쥘 만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성일 칸영화제 공식시사가 아니라 프레스 시사회에서 처음 이 영화를 봤다. 한마디로 지구상 최초의 <엘리펀트>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셈이다.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이 영화 죽이겠구나’란 감이 왔다. 운동장에서 미셸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은 최고 걸작이 될 것이다 싶었고. 지금까지 본 칸영화제 경쟁작 중 호아오 세자르 몬테이로의 <오고, 가며>를 제외하고는 최고작이다. 이 영화는 미학적 입장보다 윤리적 입장으로 봐줘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 전찬일씨의 경우, 비판적 입장이 되기까지에는 칸영화제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하나의 요인이 됐을 것 같다.

전찬일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전혀 새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째 보니 더욱 새롭지 않다. 구스 반 산트와 칸영화제라는 이름을 지우고 얘기해본다면, 이 영화는 그저 주목할 만한 영화에 그쳤을 것이다. 배경음악으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사용한 것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음악을 사용하다니. 이 영화에 감동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적 효과가 아니라 음악적 효과 때문이다. 중요한 장면에서 심금을 울리려는 촌스러운 음악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롱테이크와 들고찍기로 찍었다는 점 역시 그 자체가 작가적 징후로 읽혀지는 일종의 표지라는 점에서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칸영화제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과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양쪽 모두에 상을 줄 정도로 왔다갔다하는 영화제다. 경쟁부문이 아니라 ‘주목할 만한 시선’에 이 영화가 출품됐어야 했다고 본다.

스펙터클 제거한 윤리 돋보여 vs 그 설명없는 척하는 윤리적 태도가 문제

사회 반대의견을 들어보자. 정성일씨가 아까 이야기했던 말. 즉, 미학적인 면보다는 윤리적 측면으로 영화에 접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정성일 이 영화는 시간을 계속 반복시킨다. 같은 시점으로 영화는 몇번이고 되돌아가고 있다. 미셸이 운동장에서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장면은, 알렉스가 피아노를 방에서 치던 장면과 같은 시점이다. 이렇게 영화는 끊임없이 시간을 되돌려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마지막 장면을 이해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아까 전찬일씨가 치기어린 롱테이크라고 비판했는데 이 영화에서 롱테이크와 화면의 비율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영화의 화면비율은 1.33:1이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쓰는 1.85:1을 쓰지 않았다. 왜일까? 1,33:1은 딱 폴라로이드 사진의 크기비율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폴라로이드와 같은 1회성의 사진을 찍고 있는 셈이다. 단 한번 벌어진 그 사건을 충실히 기록하고 재연하는 의미로 말이다. 또한 영화 중간에 알렉스와 에릭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장면에서 영화는 가장 안정적인 화면구도를 보여준다. 화면구도를 노트북 사이즈로 만들어놓고 비디오 게임처럼 실제 인물들을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롱테이크는 비디오 게임 속에서 시간을 좇아가는 개념의 테이크로 이해해야 한다. 전찬일씨가 말한 유럽적 시간개념이 아닌 것이다. 총기장면도 그렇다. 감독은 최대한 총기장면이 스펙터클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 영화에 쓰인 반복되는 시간, 롱테이크, 화면비율은 모두 이 사건에 대한 감독의 윤리적 태도를 보여준다. 어떻게든 시간을 사건 이전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열망. 비디오 게임을 영화로 전환하되 스펙터클하지 않게 재연하려는 감독의 노력 말이다.

전찬일 그러나 이 영화는 바로 그 윤리적 태도가 정말 문제인 영화다. 처음 볼 때는 이 영화의 미학적 측면이 싫었는데, 두 번째 보니 이번엔 윤리적 태도가 정말 싫더라. 정성일씨 말대로 구스 반 산트는 영화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는다. 로저 에버트 같은 평론가도 바로 이 점에 별 4개를 주면서 길길이 뛰었었다. 그러나 설명을 하지 않으려면 아예 하지 말아야지. 이 영화는 설명을 안 하는 것 같지만 이 소년들의 살인에 대한 기분 나쁜 이유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알렉스가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에게 오물을 얻어맞는 장면, 이 아이들이 히틀러주의자란 설정, 동성애 코드의 키스장면. 이런 장면들을 집어넣지만 않았다면 이 영화는 정말 멋졌을 것이다. 그런데 감독은 이런 이유들을 집어넣으면서 호모포비아적 태도마저 보이고 있다. 아이들이 죽는 장면도 그렇다. 감독은 처음 죽는 미셸과 흑인 베니, 교장선생만을 자세히 구체적으로 보여줄 뿐 다른 아이들이 죽는 모습은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중에서도 베니는 난리통 속에서 어벙하게 교실을 어슬렁거리다가 죽는다. 난 바로 이 지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다들 베니가 어슬렁거리며 걸어갈 때 저 흑인 아이가 뭔가 해내고 흑인 영웅이 되겠구나 싶었을 것이다. (모두 웃음) 그런데 그저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렸다. 하필 왜 여자, 흑인, 교사인가. 왜 이런 악의적인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1.33:1의 비율은 그냥 이 영화가 애초에 TV용으로 기획됐기 때문이다. 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정성일 일단 알렉스가 수업시간에 오물을 얻어맞는 장면은 일반적인 교실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이때 이미 알렉스는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그것 좀 얻어맞았다고 새삼스럽게 사건을 계획한 것이 아니다. 알렉스가 끊임없이 머리를 흔드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알렉스는 아이들이 불쌍한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나한테 죽을 텐데, 쯧쯧, 하고 말이다. 나치영화를 보는 장면도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아이들이 나치영화를 볼 때 감독은 TV가 아니라 창 너머 풍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게다가 “무슨 프로 봐?” 란 질문에 “몰라, 나도”라고 대답하지 않는가. 아이들은 그냥 틀어놓고 있을 뿐이다. 호모포비아에 대한 오해도 그렇다. 아이들의 샤워신은 그냥 세리머니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건은 이미 벌어졌다. 우리는 실재를 마주했고, 실재는 이미 말을 걸어오고 있다. 이를 보여줄 때 가장 나쁜 방식의 영화가 바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다. 원인을 물어보는 것은 편한 것이다. 원인을 물어보는 순간 자신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구스 반 산트는 그것을 피하고 있다. 원인을 섣불리 물어봄으로써 자신은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행동 말이다.

원인 설명은 폭력에 굴복하는 것 vs 문제의식을 원했다면 관객과 소통했어야

사회 <볼링 포 콜럼바인> 이야기가 나왔는데, 정성일씨가 가장 편하고 저급한 방식이라고 표현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에 대해 전찬일씨는 입장이 다를 것 같다.

전찬일 그렇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볼링 포 콜럼바인>쪽이다. 아까 이야기한 동성애 코드, 여성혐오 등은 모두 오해의 소지를 이야기한 것이다. 왜 굳이 이런 오해의 소지를 다분히 남겨놓은 채 영화를 만들었는가. 영화에서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수많은 아이들이 등장하지만 캐릭터와 이름을 부여받은 아이들은 12명에 불과하다. 이 12명에게 캐릭터를 부여했을 때 감독은 이미 그 12명을 통해 하고픈 이야기를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오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욱 못마땅한 것은 학생들이 배우도 아닌데 연기를 한다는 것이다. 비전문배우라면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일상적으로 보여야 하는데 이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식해서 연기를 하고 있다.

사회 올바른 정치적인 힘을 확장시키는 것이 저널리즘이라면, 이 영화도 어느 정도는 저널리스틱해 보인다. 그 점에서 효과는 <볼링 포 콜럼바인>이 더 크지 않을까 싶은데.

정성일 마이클 무어는 영화적 파파라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지지할 수는 있지만 미학적 측면에서는 지지할 수 없다. 결과에 대해 원인을 찾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벌어진 사건을 두고 가타부타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원인을 설명하다보면 폭력을 설명하게 된다. 설명하는 순간 이 영화는 가짜가 된다. 설명하는 순간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폭력은 설명하면 안 된다. 그저 거부해야만 할 뿐이다.

전찬일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도 주제의식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소통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관객이 별로 들지 않았다고 한다. 관객이 좀더 쉽게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영화는 과시용이 아니다. 문제의식과 자각을 원했다면 소통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고 본다. 소통이 되지 않는 한 이 영화는 치기어린 문제작으로만 남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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