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팻 걸> 감독 카트린 브레이야를 비판한다
2004-09-08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카트린 브레이야의 <팻 걸>에 관한 평 중 ‘불쾌하다’는 불평에 버금갈 만한 동조와 상찬의 표현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적극적인 해석도 있을 수 없다. 그 표현은 언제나 여성을 제대로 그려내기 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지는 브레이야의 영화에서 안전장치로서의 쾌락을 넘어선 희열(jouissance)을 목도했다는 고통스런 고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 <팻 걸>에서 그 고통의 쾌락은 정말 성사되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제 희열은 텍스트 차원에서 브레이야 스스로도 다다르지 못한 영화적 정점을 ‘이론적으로’ 미리 추측하여 옹호하는 관객만의 표현일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갑작스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그 충격의 세기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담담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오히려 브레이야 영화가 유도하는 ‘강도에의 집착 또는 스타일화된 강세’에서 빠져나오고 나서야, 대단히 진보적인 듯한 성정치학과 손을 맞잡은 ‘이분적 사고와 허름한 미학’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팻 걸>은 정확히 그 예다.

오해 1: 브레이야가 사드적? - <로망스>의 포르노그라피 전략은 교육이다

대부분의 한국영화 관객에게 브레이야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로망스> 이후였다. 브레이야는 이 영화에서 정공법으로서의 포르노그라피 전략을 차용한다. 남성지배적인 포르노그라피의 이미지를 전면으로 도배하면서, 역으로 그 주체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여성의 섹스, 몸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시도를 펼친다. 브레이야는 남성들의 성적 담론을 깨뜨리기 위해서, 여성의 시선으로 섹스를 탐구하기 위해서, 그들의 강력한 응집력에 ‘대적할 만한 수위’의 강한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결정한 듯하다. 그 강도의 정당함을 <로망스>에서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센 영화’ <로망스>는 해석의 두터운 외피를 만들어냈고, 그중 하나가 사드적이라는 오해이다. 우선 그 호칭은 무책임하다. 사드가 무질서한 욕망에 몸을 맡겨 죽음의 욕동과 희희낙락거리면서 방탕하고 탕진할 것을 종용하긴 했어도, 그 점이 교육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는 없다. 거기에 어떤 성정치학이나 교육학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러나 브레이야의 목적은 언제나 일면 그것에의 전파이다. 따라서 습관처럼 여자 사드 운운하며 부를 이유가 없다. 아니, 사드라고 불리든 마조흐라 불리든 그리 큰일은 아니겠지만, 그 호칭의 신화가 브레이야 영화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장애를 만든다.

브레이야는 좀더 직접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에 <지옥의 체험>의 ‘그녀’와 같은 강인하고 환영적이며 독단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성숙한 여성을 등장시키고, 날것으로서의 감정이 필요하다고 요구될 때에는 <팻 걸>의 아나이스와 같은 소녀(<짧은 횡단>의 소년을 제외한다면)를 등장시킨다. 감독의 낯간지러운 나르시시즘과 에코로 점철된 <섹스 이즈 코미디>를 제외한다면, <지옥의 체험>이나 <로망스> 같은 영화에 찬성 안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것들은 목적을 두고 만들어진 영화이고, 추상형의 그 캐릭터는 형식적 도발과 함께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팻 걸>과 같은 영화로 넘어오면 사정은 달라진다. 거세되어야 할 이분법이 오히려 심화되어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해 2: 순결 이분법에서 해방? - 그 거대 패러다임에 오히려 종속되다

<팻 걸>과 거의 같은 구조라고 해도 다를 바 없는 (영제 )에서 릴리는 때리는 아버지에게 갑자기 “나는 이제 더이상 처녀가 아니란 말이에요”라고 소리치면서 대든다. 그건 일종의 순결의 강박에서 해방됐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그런 선언의 순간은 <팻 걸>의 아나이스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온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이 말이 선언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순결에의 해방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 생각은 그것이 지켜져야 한다는 남자들의 기준에 도리어 응답하고 만다. 말하자면, 브레이야는 그렇게 남자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집착하곤 한다. 물론, 욕망과 허상과 수치심과 불안이 공존하는 여성의 그 복잡한 첫 경험의 기원에 얽힌 감정을 남자들(나를 포함하여)은 이해하지 못한다. 때때로 브레이야는 그 순간을 숨막히는 전장처럼 잡아내거나, 여성이 새로운 심장을 얻는 통과의례로 표현한다. <팻 걸>에서 남자의 허위적인 말에 속은 엘레나도, 정확하진 않지만 강간당하는 아나이스도 둘 모두 각각 그렇게 통과한다. 그러나 미리 말했듯이 왜 ‘그것만이’ 여성의 거듭남을 마련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지 의아하다. 순결의 과부하와 결별하기 위해, 순결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논리를 따른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브레이야는 마치 모든 이분법을 깨뜨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스란히 모두 인정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사랑하는 것과 섹스하는 것이 다름을 말하기 위해 처녀인 것과 처녀가 아닌 것, 뚱뚱한 것과 날씬한 것, 어른이 되는 것과 아이로 남는 것의 이분법에 손댐으로써 다시 그 거대 패러다임에 복속되고 만다. 그 이분법이 실제로 세상 도처에 널린 잣대이기 때문에 그걸 부수기 위해서는 영화 안에서 다룰 수밖에 없다는 해명이 가능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그것을 해결짓는 방식이 부수기 위해 가져온 세계의 논리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깨기 위한 도발의 형식이 오히려 그 원리를 모방하면서 방법을 찾을 때, 속박의 패러다임은 재생산되는 결과에 이른다.

<섹스 이즈 코미디>의 한 장면과 <팻 걸>의 한 장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섹스 이즈 코미디>에서 감독과 조감독은 세트 안 침대에 누워 배우들의 섹스 연기를 토론한다. 그러면서 “이러다 서도 책임 못 져요”라는 식의 묘한 뉘앙스가 담긴 농담까지 건넨다. 그 둘 이외에 화면에는 아무도 없다. 브레이야는 마치 세트장이 밀실로 변하여 그 둘만 있는 것으로, 마치 우리만(관객만) 보고 있다는 쪽으로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잠시 뒤에 카메라가 돌아가면 그 앞에 버젓이 모여 상황을 함께하는 스탭의 모습이 보인다. 이 장면은 오해의 강도를 역이용하여 훔쳐보기의 감정에 흠집을 내겠다는 브레이야의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도리어 여기서의 카메라는 ‘훔쳐보기의 카메라’를 자처한다. 이 장면의 구성 방식은 <팻 걸>의 엘레나가 남자친구와 섹스하는 장면을 동생인 아나이스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 물론 시선의 담지자는 아나이스, 즉 여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시선 체계의 원리이다. 영화는 아나이스가 섹스하는 언니를 훔쳐보게 하면서, 그걸 보는 아나이스를 관객이 훔쳐보게 만든다. 그러면서 시선의 권력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날씬한 소녀의 첫 경험을 뚱뚱한 소녀가 훔쳐보고, 그것을 다시 관객이 훔쳐보면서, 즉 남자들이 흔히 구분해놓은 두 모델을 시선의 주체와 대상으로 놓고, 제거해야 할 원리를 오히려 흉내내어 장면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복속의 징검다리를 건너게 된다. 어쨌거나, 이런 시선의 처리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그 정사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브레이야 스스로가 <섹스 이즈 코미디>에서 <팻 걸>의 두번의 침실장면 중 하나에 대한 이상적인 버전을 제시하면서 그 의도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브레이야는 여전히 언니 엘레나의 첫 경험을 다시 성찰할 생각을 하긴 했어도, 아나이스의 첫 경험을 성찰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점이 바로 <팻 걸>의 엔딩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보이게 만든다.

오해 3: 텍스트의 희열? - <팻 걸>의 벼락치듯 끝난 궁색한 결말

카트린 브레이야는 결국 <팻 걸>에서 다른 식의 엔딩 구조를 찾지 못한다. 이 엔딩은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버리다니, 도대체 왜?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강간당하게 놔두다니, 그럴 수가!’라고 윤리적으로 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물들의 소원과 의지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남자와 자고 나서 혼이 난 엘레나는 집에 가는 길에 엄마를 향해 말한다. “죽었으면 좋겠어.” 자신에게도 말한다. “나도 같이 죽을 거야.” 동생 아나이스가 토하면서 대답한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언니는 대답한다. “걱정마, 넌 죽을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까.” 엄마와 엘레나는 죽고 아나이스는 살아남는다. 다시 다른 대사. 언니는 “첫 경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고 한다. 아나이스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첫 경험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둘 모두가 성사되지만, 그중 처음은 거짓이다. 대신 아나이스는 강간으로 진짜 소원을 이룬다. 사실, 아나이스가 강간을 당했는지 아닌지 그런 건 중요하지가 않다. 그건 아나이스가 이미 노래와 대사로 예고한 것이었고, 철저하게 영화적으로 아나이스의 소망 실현이다. 더욱이 우리는 실제로 그 장면을 보지도 못했다. 중요한 건 아나이스의 소망을 이뤄주는 브레이야의 영화적 해결이 기껏해야 강간의 구조로밖에는 짜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브레이야는 마지막 장면을 그 이외에 다른 것으로 상상하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폭력 앞에서 욕동을 느끼는 아나이스(엄마와 언니가 죽는 걸 보는 순간 아나이스의 허벅지로 물이 흐른다)의 희열을 그려내긴 했지만, 강간의 구조, 남자들의 그 끈질긴 이분법의 사례를 도로 가져오면서 텍스트의 희열에는 오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갑작스럽고 궁색한 이 결말은 <팻 걸>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장치에서 내려온 신>이라는 어원처럼 벼락같이 등장하여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주는, 그러나 궁색한 해결방식일 뿐인- 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지만 브레이야는 그 밖의 다른 엔딩을 상상해내지 못한 것이다. 이런 구조는 조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끝없는 방탕함을 쫓아갈 수준도 아니고, 세드릭 칸의 <권태>에서 무감한 표정으로 등장하여 두 남자와 번갈아 섹스하면 왜 안 되냐고 되물으면서 남자들의 섹스 논리를 패닉으로 몰아넣는 세실리아의 위협감도 아닐 뿐더러, 샹탈 애커만의 <나, 너, 그, 그녀>의 장시간의 섹스장면이 말 그대로 몸을 몸 자체로 해방시키는 경험 같은 것에도 못 미친다.

차이를 인정않는 이분법의 사고 - 브레이야 역시 마초

만약 여성이 아니므로 <팻 걸>에 대해 침묵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래야 할 것이다. 대신 또다시 누군가 꺼내기 전까지 브레이야의 <팻 걸>은 끝까지 오해의 상찬을 받을 것이다. 마초이즘이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건 그들의 전유적인 사유가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이어서가 아니라,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이 그들의 전유적인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와 다를 바 없는 사고의 규칙이라면 그것 역시 마초이즘일 뿐이다. 아무래도 카트린 브레이야는 큐브릭 이후의 큐브릭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옳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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