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를 향한 구애로 말많은 베니스국제영화제, 9월1일 개막
“내게도 날개가 있다면….” 베니스에서 지도는 무용지물이다. 수로(水路)와 골목이 실핏줄처럼 뒤얽힌 베니스에 빠져보라. 걸어도 제자리고, 뛰어도 그 자리다. 옛날 옛적 베니스의 상인들이 매어둔 배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해변의 높다란 팔라치(palazzi). 사방을 두른 팔라치 성벽 안으로 들어가면 미로가 이어진다. 좁은 골목 양편에 전시된 갖가지 물건들에 시선을 뺏기고 나면 도리없다. 물어온 길도 헷갈리기 일쑤다. 베니스가 방사한 거미줄에 걸려든 이상 누구나 한번은 바둥거림 끝에 기진을 각오해야 한다. 게다가 한 시간 간격으로 어김없이 들려오는 산 마르코 성당의 종소리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초행길의 이방인에겐 평온한 안식이 아니라 가혹한 채찍이다. 산 마르코 광장의 비둘기와 산 자카리아 선착장의 갈매기가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정말이다. 목적지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꽁지에라도 매달리고 싶다.
위기의식 때문일까, 할리우드에 러브송 부른 베니스
새 간지(干支)를 받아든 베니스영화제 또한 날개가 필요했던 것일까. 칸, 베를린과의 힘겨루기에서 뒤로 밀려난 현실을 더이상 눈가림할 수 없다면, 비아냥을 감수하고서라도 긴급 타전을 보내야 한다는 게 제61회 베니스영화제의 판단인 듯하다. 5개월 전 정치권과의 불화 끝에 낙마한 모리츠 데 하델른 대신 마르코 뮐러를 새로운 집행위원장으로 앉힌 영화제로선 고민할 시간 또한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할리우드의 프로듀서와 배급 관계자들을 만나 베니스가 그들의 비상을 위한 발사대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일이었다”는 마르코 뮐러의 토로에선 ‘메이드 인 USA’ 필름을 늙은 황금사자의 축 늘어진 목덜미에 칭칭 감아서라도 핼쑥한 영화제의 얼굴에 혈색을 불어넣겠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 톰 행크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를 보기 위해 리도에 죽치고 있는 기자들은 거의 다 모여들었다. 기자회견 직후 베니스의 포문을 연 두 스타에게 추가 질문과 사인을 받기 위해 취재진은 우르르 단상으로 몰려가는 장관을 연출했다.
베니스의 설득이 수포로 돌아가진 않았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많은 할리우드영화들이 9월1일 개막식을 전후로 리도섬을 찾을 예정이다. 초청장을 받아든 영화만 해도 개막작인 <터미널>을 비롯해 20편에 이른다. 변덕 심하고 발길 무거운 할리우드 스타들 또한 베니스 나들이에 나선다. 스티븐 스필버그, 톰 행크스를 필두로 <탄생>(The Birth)의 니콜 키드먼, <만추리안 캔디디트>(The Manchurian Candidate)의 덴젤 워싱턴, <콜래트럴>의 톰 크루즈, <베니스의 상인>의 알 파치노, 여기에 더해 로버트 드 니로, 스파이크 리, 리즈 위더스푼, 쿠엔틴 타란티노 등이 붉은 기둥 위에 세워진 60개의 황금사자상을 지나 외관에만 10억원을 들였다는 팔라조 델 치네마(Palazzo del Cinema)에 들를 것이다. 도착 직후 이탈리아 유력 일간지인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re della sera)와의 인터뷰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우린 웃는 순간을 기억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할리우드영화는 고통스런 경험의 시간 속에 있는 우리에게 그러한 믿음을 아직까지 가져다줄 수 있다”라며 다소 진부한 예찬론을 펼쳤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마르코 뮐러는 “베니스영화제의 주인은 관객이고, 올해 축제는 열기에 찬 스타디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제를 향한 베니스 안팎의 시선은 여간 가시돋친 것이 아니다. “칸을 벤치마킹하려는 것이냐?”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심지어는 ‘베니스는 오스카 캠페인의 시작’이라는 비아냥까지 적지 않게 흘러나온다. 특히 56년 만에 부활한 개막식 정장 착용 의무에는 “가난한 이들을 손쉽게 가려내서 배제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일 가제티노>를 비롯, 베니스 지역 언론들은 개막 직후 열린 호화판 연회에 연일 집중 포화를 퍼붓느라 정신없다. 인테리어 공사에만 1억원을 들였다는 터널 모양의 이 천막 연회장에서 지중해식 해산물을 먹을 수 있었던 이들은 영화제 스폰서와 특급 게스트 300명. 개막식 참가자 900명 중 초대받지 못한 다수의 성토만으로도 영화제는 시작부터 시끌벅적하다. 초청장을 받아들지 못한 하원의원 중 한명은 “주최쪽의 임의적인 행사는 프로의식의 결여”라며 “같은 시간에 내 친구들을 다른 행사에 초대할 것”이라고 뒤늦게 보이콧 선언을 했다.
△ 개막식 전경
△ 개막 전날. 영화제 스탭들이 주요 기자회견과 회고전이 상영되는 카지노 건물 안에 그동안 베니스를 찾았던 감독과 배우들의 얼굴로 가득 찰 전시물을 설치하고 있다.
아시아영화에는 무관심, 라인업만으론 수상 추측 어려워
알력 싸움은 그러나 힘있는 자들의 것이다. 베니스를 찾은 시네필들은 일찌감치 상영을 시작한 1970∼80년대 이탈리아 B급영화 회고전부터 하나둘 선보이기 시작하는 경쟁부문 작품들까지 매일매일 식단을 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올해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21편의 라인업에선 유럽, 아시아,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적절한 안배가 무엇보다 눈에 띈다. 이탈리아영화에 대한 배려와 미국영화에 대한 선호가 없진 않지만, 나머지는 각국의 대표선수들을 고루 불러모은 듯한 인상이다. 지난해 마르코 벨로키오가 수상하지 못함에 따라 박탈감을 느낀 이탈리아 현지 언론들은 로베르토 베니니, 난니 모레티와 함께 1990년대 삼두마차로 불리는 잔니 아멜리오의 <더 하우스 키스>(The House Keys)를 응원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경쟁부문에선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소재만으로 격렬한 찬반 반응을 끌어낼 만한 작품을 가려내기란 어렵다. 첫 테이프를 끊은 그리스 감독 니코스 파나요토풀로스의 <딜리버리>(delivery)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아테네로 흘러들어온 알바니아 남자와 몸을 팔아 번 돈으로 마약을 하는 여자의 짧은 만남을 따르지만 파격은 찾아보기 힘들다. 죽은 남편이 우연히 만난 10살 소년의 몸으로 환생했다고 믿는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조너선 글레이저의 <탄생>(Birth)이 현재로선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다. 여기에는 니콜 키드먼이 과연 욕조에서 아이와 키스장면을 찍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관심도 한몫했다. 한 커플이 헤어지기까지 과정을 역순으로 파고들어가는 프랑수아 오종의 <5x2>, 30년을 누워 살아야 했고 이제는 안락한 죽음만을 원하는 남자를 클로즈업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바닷속으로>(The Sea Within), 9·11 사태로 인해 과거 베트남전의 악몽에 사로잡힌 퇴역 용사와 의지할 곳 없는 아프리카 소녀의 만남을 통해 미국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병치할 빔 벤더스의 <풍요의 땅>(Land of plenty), 전남편을 환자로 받아야 하는 정신과 여의사의 고민을 묘사한 아르노 데스플레생의 <왕과 왕비>(Kings and Queen) 등이 그뒤를 잇고 있다.
애니메이션으로 베니스 경쟁부문에 처음 오른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Howl’s Moving Castle)을 제외하곤 아시아영화들에 대한 관심은 이전보다 못한 편이다. 최근 몇년 동안 각종 영화제의 큼지막한 상들을 싹쓸이했다는 것에 대한 견제라고 봐야 할까. 그런 무관심의 시선에서 예외가 있다면 모흐센 마흐말바프가(家)의 안방마님인 마르지예 매쉬키니의 <떠돌이 개>다.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영화제 특별판 1면에 이례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집없는 아이들에 관한 이 영화를 소개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눈동자가 잊고 있었던 네오 리얼리즘의 감흥을 다시금 일깨운다”고 썼다. 지하에서의 투쟁을 멈추고 중국 정부와 악수를 나눈(진정한 화해인지 아니면 제스처인지는 영화를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지아장커의 <세계>는 마르코 뮐러가 중국학 박사라는 사실, 그리고 베니스가 여타 영화제들에 비해서 집행위원장의 입김이 거세다는 사실에 근거해 수상을 점치는 이들이 있긴 하다.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에 대해서는 “한국 근대사의 30년이 응축된 드라마”라는 간단한 영화 내용 말고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어차피 추측은 가능성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누구의 손에 황금사자상이 돌아갈지는 월드컵의 승자가 누가 될지를 맞히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아닌가. 그렇다면 관심의 초점을 ‘위너’(winner)의 정체를 밝히는 데 맞춰선 안 된다. 어차피 축제 아닌가. 오토모 가쓰히로의 <스팀 보이>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릴 베니스에서 보내는 두 번째 기록은 내키는 대로 즐긴 향유의 결과물이 될 것이다.
△ 개막식이 시작되기 30여분 전. 붉은 카펫에 긴 다리를 얹을 스타들을 오매불망 기다리다 50대 부인이 실신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결국 그녀는 남편인 듯한 남자의 부축을 받고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왼쪽 사진)
△ 혹시 독서실? 아니면 고시원? 개막식을 끝내고서 사진을 전송하느라 바쁜 각국의 사진기자들. 20석도 안 되는 프레스 룸의 노트북 테이블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때론 고성과 완력도 불사해야 한다. 험악한 인상은 무엇보다 필요하다. (오른쪽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