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볼 때 그 이면에 자리한 감독의 존재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끔은 제작자의 실루엣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싸이더스 영화에서 차승재 대표의 기가 느껴지거나 시네마서비스 영화에서 강우석 감독의 수가 읽히는 것처럼. 아버지와 딸의 운명적 사랑 이야기인 <가족>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가능하다. 늦둥이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이나, 아버지가 조직 보스에게 등을 굽히는 장면 등은 분명 이정철 감독이 창조한 세계임에 틀림없지만, 같은 제작사에서 만든 <집으로…>와 <파이란>과도 그리 멀지 않은 느낌을 준다. 세편이 모두 다른 배경과 맥락을 갖고 있음에도 그 정서와 기운에서 비슷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제작자의 ‘보이지 않는 손’이 닿았기 때문일 터. 자신의 네 번째 ‘아이’ <가족>의 개봉을 준비하면서 숨찬 나날을 보내는 황우현 튜브픽쳐스 대표를 만났다(이 인터뷰는 <가족>의 개봉 직전에 이뤄졌습니다).
<가족>의 시사회 반응이 뜨겁다고 들었다.
나도 깜짝 놀랄 정도다. 특히 여성 관객의 반응이 뜨겁다. 훌쩍거리는 소리 때문에 영화를 못 볼 정도더라.
그렇게 시사회 반응이 좋다면 발 뻗고 편안하게 쉬면서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닌가.
시사회가 좀 늦었다. 9월3일 개봉인데 8월23일부터 시작했으니까 많이 늦은 편이다. 1주일만 빨리 했어도 입소문이 좍 났을 텐데. 스타 배우가 나오지 않아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아 하루에 시사회를 7∼8회씩 가진다. 8월30일엔 12군데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모두 1만8천명을 상대로 시사회를 가질 계획이다. 그러다보니 전 직원이 나서서 시사회를 진행하고 있다. 회사 전체가 <가족>에 ‘올인’했다. 심지어 우리 회사 소속 프로듀서들 4명까지 부산에서 시사회 진행을 하기도 했다. 1천석짜리 부산극장을 빌렸는데, 400명밖에 차지 않아 남포동을 휘저으며 사람들을 모아 객석을 채웠다고 한다. 자기들 일도 아닌데, 열심히 해줘 고마운 마음이다.
<집으로…>를 개봉할 때도 시사회를 통한 입소문 효과를 톡톡히 봤다던데. 그런 조짐이 느껴지나.
현재까지의 분위기는 매우 좋다.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을 봐도 욕하는 게 하나도 없다. 그건 <집으로…> 때와 똑같다. 시사회가 끝나고 감독님을 붙잡고 “이렇게 좋은 영화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분들도 보인다. 잘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초조한 것 또한 사실이다. 현재 스크린은 150개 정도 확보했는데, 첫 주말에 관객이 잘 들면 늘려가기로 배급사인 튜브엔터테인먼트와 합의했다. 추석 시즌까지 끌고가는 게 목표다.
<가족>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2009 로스트 메모리즈>를 만든 이시명 감독이 이정철 감독을 소개해줬다. 이정철 감독이 그때 자작 시나리오를 가져왔는데 그게 <가족>이다. 시나리오를 보고 30분 만에 하기로 결정했다. 그게 2002년 말이다.
영화를 해보지 않은 수애를 주연에 기용한 것은 모험이 아니었나.
애초에는 잘 알려진 스타배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우가 안 하겠다고 하더라. 수애는 바로 그 다음 카드였다. 사실, 이 감독은 드라마 <러브레터>를 보고 수애를 1순위로 점찍고 있었지만, 제작사와 투자사가 “어떻게 신인에게 주연을 맡기냐”고 할까봐 내색을 않았다고 한다. 수애를 직접 만나본 뒤에는 모두가 확신을 갖게 됐다. 특히 맑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가장 걱정했던 장면이 정욱 선생님과 아버지의 과거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었는데, 수애의 맑은 눈이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과 또한 만족한다.
주현씨를 캐스팅하는 데는 난관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정철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주현’이라고 할 정도로 주현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본 선생님이 문제를 제기했다. 머리를 삭발해야 하는 장면 때문에 못하겠다고 하더라. 만약 그 장면에서 가발을 쓰면 티가 날 게 분명했다. 설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류수철 프로듀서와 감독에게 내가 그랬다. “우리가 먼저 머리를 깎자. 일단 류 PD가 머리를 깎고, 안 되면 감독이 깎는다. 그래도 안 되면 내가 깎는다”고. 결국 류수철 PD가 머리를 깎고 주현 선생님을 찾아갔고, 그날 출연이 결정됐다. 영화로 봐도 그렇지만 나로서도 다행스런 일이었다. (웃음)
제작비는 얼마나 썼나.
순제작비는 17억3천만원이다. 마케팅비가 그 못지않게 들겠지만.
굉장히 싸게 든 편이다.
어느 정도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에 싸게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탭들을 신진급으로 기용했고, 개런티도 적은 액수에 계약했다. 대신 관객 수가 150만명을 넘으면 인센티브를 30%씩 추가지급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적은 예산 때문에 고생이 많았겠다.
2003년 12월18일 크랭크인해서 올해 3월19일 크랭크업했는데 모두 32회차밖에 안 된다. 수애가 <회전목마>에 나오고, 주현 선생님도 스케줄이 바쁠 때라 일주일에 3번 이상 찍을 수 없었다. 나중에 3회 보충촬영했는데, 거의 사용하진 못했다. 주인공의 집도 오픈세트를 따로 만든 게 아니라 삼선동 철거촌의 한 집을 보수해서 썼다. 그 집 세트 안의 가구며 집기도 모두 철거촌에서 주워왔다. 아무튼 감독 입장에서는 악조건이었을 거다. 그래도 한번 화를 내지 않고 안정적이고 성실하게 촬영에 임해준 감독에게 가장 감사한다.
다 해놓고 나서 아쉬운 점은 없나.
(약간 망설이다가) 우리 영화에 누가 되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 흥행이 된 다음에 얘기하겠다. (웃음)
김수현 감독의 <귀여워>는 완성됐는데 개봉을 안 하고 있다.
5월쯤 프린트가 나왔는데,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개봉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루고 있다. 시나리오 때부터 든 생각인데 <귀여워>는 대단한 영화다. 흥행작은 아니지만 분명 완성도 면에서 특별한 영화라는 것을 확신한다. 현재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상태인데, 영화제 끝나고 11월쯤 개봉할 예정이다.
또 어떤 영화를 준비하고 있나.
고3 여자아이의 애틋한 러브스토리 <울어도 좋습니까>는 동국대와 영화아카데미를 나온 최창환 감독이 만든다. 올해 12월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성수 감독의 조감독 출신 황병국 감독의 <나의 결혼원정기>는 내년 2월에 크랭크인한다. 두명의 한국 농촌총각이 결혼을 하러 우즈베키스탄에 가는 이야기다. 이정향 감독은 현재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무슨 내용인지 절대 안 가르쳐준다. 그외에 <삼수생의 사랑이야기>나 <충칭의 별 이장수>도 준비 중이다.
만만한 프로젝트가 없어 보인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트렌드보다는 영화적 완성도에 힘을 기울이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나는 영화를 돈이 된다고 믿으니까 한다. (웃음)
그들 영화의 투자는 확정됐나.
아직 아니다. 이를 위해서도 <가족>이 잘돼야 한다. 여러 대기업들이 기웃거리는 등 자본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전망이다. 우리 또한 아주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튜브엔터테인먼트와의 관계는 어떤가.
지난해 법인으로 분리는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특별한 연관관계는 없다. 다만 김승범 대표와의 오랜 친분 때문에 함께 갈 수 있는 부분은 계속 함께했으면 한다.
어찌됐건 투자사와 끈을 갖지 않은 제작사를 운영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
사실이다. <가족>을 끝낸 뒤에 진지하게 고민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