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답은 쉽다. 밥을 먹고 산다. 예술은 원래 배고픈 거라고? 그렇다고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혈혈단신 가벼운 혼잣몸이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한 집안의 가장이자 줄줄이 딸린 애들의 아버지가, 예술가라는 직업 아닌 직업을 소유했을 때 문제는 꽤나 복잡해진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의 예술 시장에는 예술가말고도 꼭 존재해야 하는 핵심 멤버가 두 부류 더 있다. 예술가의 예술작품을 적절한 재화를 지불하고 구매해 주는 것은 후원자의 몫이며, 예술가와 후원자 사이에서 예술작품의 판매를 효과적으로 대행하는 것은 거간꾼의 역할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도 어김없이 이들이 등장한다. 천재적 화가 베르메르 뒤에는 탐욕스러운 후원자 반 라이번이 있고, 이 둘 사이에 베르메르의 장모가 끼여들어 에이전트 노릇을 한다.
이 삼각구도의 한 가운데 소녀 그리트가 서 있다. 소녀는 하녀다. 부르주아 가정에 고용된 어린 하녀가 위험한 섹슈얼리티의 기운을 뿜어내며 주인어른을 유혹하여 예민한 사모님을 신경쇠약증 환자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하지만 이 하녀는 좀 다르다. 주인어른과 모종의 관계를 맺게 되는 건 분명한데 그 모종의 관계가 외설적인 것이 아니라 심히 예술적인 것이다.(사모님의 심기를 극도로 불편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별다르지 않다)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불안하게 마주친 찰나, 삐리리 필이 통하긴 했지만, 그들은 육체적 사랑을 나누거나 야반도주하는 대신 그 불같은 열정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베르메르와 그리트는 화가와 모델인 동시에 스승과 제자이며 영혼의 연인이다.
예술의 주변에 존재하는 네 번째 인간형은 바로 실패한 예술가 지망생이다.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에서, 소녀는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미술적 재능을 발견하지만 결국 아무런 현실적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푸줏간의 안주인으로 돼지머리와 함께 여생을 살아가게 된다. 어차피 이루지 못할 꿈이라면, 필부는 예술의 세계를 아예 모르고 사는 편이 더 행복했을까. 무엇이 정답인지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궁금한 것은, 그리트에게 흑심을 품고서 그 아이를 그린 그림을 보고 싶어 했던 후원자가 없었더라도 베르메르가 소녀를 화폭에 담을 엄두를 냈을까, 하는 점이다. 또한 얼른 그림이 완성되어야 생활비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는 거간꾼 장모가 딸마저 배신하고 사위에게 진주 귀걸이를 훔쳐다 주지 않았더라도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세상에 탄생했을까. 그럼에도 영화 내내 후원자와 거간꾼은 악인으로 묘사된다. 예술가의 아내는 끊임없이 아기를 낳고, 외상을 할지언정 푸줏간의 고기를 먹고, 하녀를 부리고, 장신구를 사들인다. 돈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이 복작복작 구질구질한 일상에 상관없이 영혼의 연인과 화실에 유폐되어 그를 시선으로 더듬고 붓으로 그린다. 그것이 미적 절대성의 영역이라면 예술의 아름다움만큼이나 가혹한 기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