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레오 타입에 얽매이지 않은 멋있고 강한 아시안 남성상을 보통의 할리우드영화에서 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블록버스터들의 여름 전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8월의 마지막 주, 장이모 감독의 <영웅>이 기대 이상으로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는 뉴스는 딱 절반의 기대감을 선사한다. <라스트 사무라이> 혹은 <와호장룡>에서 그랬듯, 아시안 영웅들의 매력은 쿨하기 그지없으나 그 매력이 저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는 ‘무사도’ 내지 ‘무술’의 힘을 빌려서야 발산된다는 점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태권도와 쿵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여느 백인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이 멋있을 수 있는 아시아 남성상을 그려내는 것. 할리우드의 하얀 장벽에 도전하는 많은 아시안 배우들의 공통된 소망일 것이다.
<영웅>의 뒤를 이어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른 <아나콘다2: 사라지지 않는 저주>에서 그 도전의 첫발을 내디딘 한국계 미국 배우, 칼 윤(한국명 윤성권)을 영화 개봉 전 할리우드의 에이전시 사무실에서 만났다. 릭 윤의 동생이라는 타이틀로 화제가 되는 것이 약간은 부담스럽다는 이 신인배우에게 <아나콘다2…>는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1997년, 제니퍼 로페즈를 세상에 알렸던 원작 <아나콘다>는 아마존 정글에서 식인뱀과 사투를 벌이는 다큐멘터리 영화제작팀의 모험을 B급영화의 감수성으로 만들어낸 컬트 히트작. 존 보이트, 아이스 큐브 등의 개성있는 연기와 대사, 오락영화의 정석을 따른 서스펜스로 의외의 성공을 거뒀다.
속편 전문가라는 별명이 붙은 드와이트 리틀 감독(<할로윈4> <프리 윌리2>)의 지휘하에 무대를 말레이시아의 보르네오섬으로 옮긴 속편격 <아타콘다스>에서 칼 윤은 원정대를 도와주는 말레이시아 원주민 가이드 역할을 맡았다. 이번 영화가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의 그의 첫 작업이라는 점에서 맡은 역의 경중에 상관없이 기대가 크다는 소감이다. 불로장생약의 원료가 될 수 있는 신비의 열대꽃을 찾아 정글을 헤매는 탐험대가 수십 마리의 식인뱀, 아나콘다와 벌이는 서바이벌 모험이 영화의 줄거리. <아나콘다2…>는 평론가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막바지 여름을 식혀줄 오락영화로 흥행의 기선을 잡았다.
뉴욕 컬럼비아대학 재학 시절,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로미오와 줄리엣> 오디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연기생활을 시작해서 오프 브로드웨이무대와 로레알 등의 모델 일을 겸하던 칼 윤이 로스앤젤레스로 옮겨온 것은 바로 아시안 청춘스타가 되고 싶다,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라고. 좀더 많은 일반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할리우드 주류로 진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유망한 TV드라마 <올 어바웃 칠드런>의 캐스팅 제의도 거절했다. 아시안계 배우들이 좀더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할리우드 문을 두드리고, 아시안 배우들을 주연하고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영화들이 나올 때 결국 할리우드의 ‘결정권자’들도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기도 한 한국계 미국인 존 조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던 <해롤드와 쿠마, 화이트 캐슬에 가다>가 더 좋은 흥행 성적을 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단다.
아직은 스테레오 타입의 굴레를 피해갈 파워가 없는 신인배우로서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주연으로 출연한 USC 영화학과 출신 황동혁 감독의 단편영화, <미라클 마일>(Miracle Mile)이라고. 그동안 몇몇 단편영화 작업을 했지만, <미라클 마일>에서의 한국계 입양아인 불법 택시운전사 역이 그에게 남달랐던 이유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한국과 미국 문화 양쪽에 걸쳐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반영하는 영화의 진정성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미라클 마일>에서처럼 한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사이의 다리가 될 수 있는 역할을 맡고 싶다고.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들처럼 강인한 한국 남성상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포부도 숨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여름 블록버스터답게 무시무시한 식인뱀이 주인공일 <아나콘다2…>에서 칼 윤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기란 조금 힘들겠지만, 이번 가을에 미라맥스가 그의 할리우드 진출 두 번째작, <포비든 워리어>(Forbidden Warrior)를 배급할 예정이라니 조금 더 기다려도 좋을 듯하다. <아나콘다2…>의 한국 개봉에 앞서 마침, 황동혁 감독의 <미라클 마일>이 제4회 광주국제영화제 ‘광주 단편선’에 초대돼 9월3일 상영 예정이라니 한국 관객도 릭 윤의 동생이 아닌 영화배우 칼 윤을 만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