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비평 릴레이] <연인>, 정성일 영화평론가
2004-09-14
글 : 정성일 (영화평론가)
장이머우의 ‘무협’ 낭만은 파시스트적 매혹일뿐

“장이머우가 이렇게 되는 건 필연적인 일입니다. <붉은 수수밭>이나 <홍등>에서 이미 그런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이머우가 <영웅>같은 블록버스터를 찍는 것은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장이머우는 영웅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술영화로는 영웅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영웅이 되려는 것입니다. 장이머우는 이런 가치관, 그 중에서도 할리우드의 오스카 콤플렉스가 무척 심한 것 같습니다. (중략) <영웅>은 영웅이 되기 위해 노예가 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베이징 지하전영 세대인 지아장커는 중국 영화 제 5세대인 장이머우의 <영웅>에 대해서 맹렬한 적개심을 보였다.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그건 일종의 변절이다. 그런데 장이머우는 거기서 더 나아가고 있다. 그의 두 번째 무협영화 <연인>은 거의 점입가경이다. 장이머우의 시나리오는 부분적으로 <무간도>를 연상케 하는 ‘언더커버’의 반전(의 반전)이 계속되지만 따분하게도 이미 눈치 챈 다음이며, 중국 산수화에 기댄 풍경들은 <와호장룡>을 연상케 하면서 그에 미치지 못한다. 어쩌면 제작자 빌 콩은 장이머우에게 곽재용의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시나리오를 보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바람’의 운명론) 게다가 정소동의 무협액션 장면들은 (<매트릭스>의) 원화평의 ‘따분한’ 카피 버전이다. 그러나 그 어느 대목에서도 넋을 빼앗거나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 이제는 인정을 해야 한다. 장이머우는 무협영화에 재능이 없다. 그런데도 그걸 하고 싶어한다. 그건 무협영화라는 이 장르가 신화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장이머우는 신화를 새로 쓰고 다시 창조해내는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혹은 영웅을 찾아 나선다.

장이머우는 정확하게 홍콩 무협영화가 신화의 죽음을 선언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사실상 왕자웨이가 질서를 잃은 플래시백의 기억과 스펙터클, 김용과 SFX, 세트와도 같은 모래사막 위에 세워진 한 채의 객잔에서 <동사서독>을 만들었을 때 무협영화는 거기서 끝난 것이었다. 그 다음은 후일담이다. 홍콩의 쉬커(서극)는 그 전통을 리메이크하거나(<칼>), 대만의 리안은 회고하였다(<와호장룡>). 그러나 중국의 장이머우는 반복한다. ‘어떤’ 의미에서 <영웅>은 <동사서독>에 역사를 부여한 원형이판본이고, ‘그런’ 의미에서 <연인>은 <와호장룡>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동어반복이다.

왜 그럴 필요가 생겨난 것일까? 중국어권 영화에서 무협영화는 미국에서 서부극과 같은 장르이다. 서부극은 결국 미국 자본주의의 신화이며, 남북전쟁의 선악의 도덕이며, 이민자들의 거짓 역사이다. 무협영화는 중국 본토에로의 향수이며, 사회주의 중국 ‘이전’의 추억이며, 망명의 신화이다. 그러므로 이 신화는 절대적으로 타자의 담론이 일으키는 소란이다. 그러나 그것을 중국에서 만들 때 무협영화는 역사의 거짓 건설이며, 신화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사화가 된다. 장이머우는 지금 중국 인민들에겐 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중국어권 문화의 거대한 통일에로의 욕망을 겨냥한다. 장이머우의 변절은 우스꽝스럽지만 그것은 위험한 제국주의가 꿈꾸는 무아지경의 자기최면술이다. <연인>의 낭만주의는 정확히 그 자리에 있다. 그 미학적 낭만주의는 파시스트적인 매혹이다. 발터 벤야민의 경고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