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김상진표 코미디영화의 새로운 시도, <귀신이 산다>
2004-09-14
글 : 문석
김상진표 코미디영화의 새로운 시도. 진화인가, 퇴보인가.

“넌 꼭 네 집을 사야 한다.” 지긋지긋한 셋방살이를 마감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나는 아버지가 외아들 필기(차승원)에게 남긴 유언은 다름 아닌 ‘내집 장만’이었다. 버젓한 조선소에서 기사로 일하는 그가 야간엔 대리운전을 하며 ‘투잡스’ 대열에 낀 것도, 슈퍼마켓에서 부득불 10%를 깎아대는 알뜰한 생활을 한 것도 따지고보면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거제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을 장만하게 된 필기가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린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 집에는 딱 한 가지 사소하다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으니, 그건 귀신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기가 아무리 ‘귀신 잡는 해병’ 출신이라지만 소파를 춤추게 하고 식칼을 날려보내며 ‘이 집에서 나가라’고 협박하는 귀신의 존재는 두려움 그 자체다. 피눈물 모아 애써 마련한 집을 귀신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한 필기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김상진 감독의 7번째 영화 <귀신이 산다>는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 어떤 틀로 굳어진 ‘김상진표 코미디’와 궤를 달리한다. <주유소…> <신라의 달밤> <광복절특사>가 공히 아이러니한 상황 속을 좌충우돌하며 휘젓고 다니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의 ‘난무’(亂舞)형 코미디였다면, <귀신이 산다>는 CG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볼거리와 슬랩스틱 연기에 의존하는 코미디다. 박영규가 <링>의 사다코처럼 TV 브라운관 밖으로 기어나온다든가, 필기의 손과 발이 뒤바뀌는 장면 등은 완벽하게 표현되진 않았지만 감독의 새로운 도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귀신이 산다>가 힘을 쏟는 지점은 코미디 코드나 호러영화 스타일의 ‘서프라이즈 효과’가 아니다. 필기가 이 집에 더불어 살고 있는 연화(장서희)의 존재를 보게 되면서 비로소 시작되는 ‘원귀의 해원(解寃)’이라는 멜로드라마 코드야말로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야심이며, 여타 김상진 감독 영화와의 가장 뚜렷한 변별점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구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승을 헤매는 연화의 이야기는 우리 전통 괴담에서 흔히 등장하는 플롯이지만 멜로드라마 구성이 꽤 단단해 그 절절함은 상투성을 넘어서는 구석이 있다. 귀신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점이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장 반장(장항선)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귀신이 산다>의 귀신들은 악의를 품고 있기보다는 이승에 대한 미련이 남은 안타까운 영혼들이다. 하지만 <귀신이 산다>를 ‘잘 만든 따스한 코미디’로 보기에 어려운 점들도 많다. 귀신으로부터 자신의 집을 사수하려는 한 남자의 분투기로 시작한 이 영화는 귀신과의 우정과 해원이라는 이야기로 궤도를 갈아타는 듯하더니 또다시 악덕 부동산 업자와의 대격전으로 뜬금없이 흘러간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 속에서 필기라는 캐릭터 또한 모호해진다. 그가 연화의 한을 풀어주려는 것은 집을 지키기 위함인가, 연화와의 우정 때문인가. 한때 집을 팔기 위해 안달했던 필기가 부동산 업자와 철거반에 맞서는 건 연화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선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선가. 이처럼 필기가 행동하는 근거가 애매해지면서 영화는 집중력을 잃어버린다. 어쩌면 김상진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할 이야기가, 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았는지도 모른다.

“단순한 캐릭터 혹은 상황 코미디를 넘어서… 새로운 코미디 장르의 진화를 예고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감독 자신의 포부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귀신이 산다>는 김상진 감독 필모그래피의 ‘2기’를 마감하고 ‘3기’를 여는 과도기의 영화일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변화의 방향은 자칭 타칭 ‘쌈마이영화’로부터의 탈출과 탄탄한 드라마 구조와 다양한 영화적 장치를 확보한 새로운 코미디의 개발일 것. 그렇다고 기발한 상황설정이나 확실한 캐릭터 같은 김상진 감독 특유의 강점마저 포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변화가 심하다 해도 <귀신이 산다>가 김상진 감독의 영화임을 알아차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신라의 달밤>에 나왔던 ‘허공 발차기’ 장면이나 <주유소…> 이후 빠지지 않는 집단난투 장면, 김상진 감독 자신의 출연, 그리고 스톱모션으로 처리된 엔딩신 등이 ‘낙관’처럼 곳곳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한발 더 나아가 <주유소…>에서 박영규가 “아마 나는…” 하면서 노래 부르는 장면을 패러디하는 ‘자기반영 유머’까지 선보인다. 이 장면들을 애교로 받아들이든 자아도취로 받아들이든, 그건 보는 이의 자유겠지만.

:: <귀신이 산다>의 연기자들

인어아가씨, 왕년의 청춘스타, 연극배우 총출동

장서희
진유영
장항선

<귀신이 산다>는 김상진-차승원 콤비의 세 번째 영화다. ‘찰떡궁합’이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 영화에서 차승원의 개인기는 빛을 발한다. 하지만 차승원이 돋보일 수 있었던 것에는 다른 연기자들의 도움 또한 큰 영향을 발휘했을 터.

<귀신이 산다>에서 우선 눈에 띄는 배우는 귀신 이연화 역의 장서희다. <인어아가씨>의 은아리영의 이미지를 벗고 영화 전업을 선언한 그는 못다 이룬 사랑 때문에 필기의 집에 붙어살며 이승을 떠도는 귀신으로 나온다. 2002년 장길수 감독의 <초승달과 밤배>에 출연했으나 아직 미개봉 상태라 이 작품이 사실상 영화 데뷔작인 셈이다. 그는 시사회 뒤 열린 기자간담회장에서 “순발력을 요하는 TV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긴 호흡을 필요로 해 어려웠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이미 김상진 감독으로부터 계약금 ‘1만원’을 받았다며 그의 차기작에 출연할 계획 또한 암시했다. 유덕화 등과 함께 서극 감독의 <칠검하천산>에 출연할 예정이기도 하다.

미스코리아 출신 손태영도 필기의 애인 수경 역을 맡아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수경은 연화의 훼방으로 필기와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끝내 필기를 감싸는 ‘대가 센’ 여인.

또 하나 반가운 배우는 악덕 부동산 업자로 출연하는 왕년의 청춘스타 진유영이다. 7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얄개 시리즈’를 통해 이승현, 김정훈 등과 함께 청춘 스타로 군림했던 그는 80년대에는 감독을 겸업하며 <인간시장> 시리즈 등을 만들어 액션스타로 거듭났던 인물이다. 이후 방송 외주 제작사를 꾸려 <도전! 지구탐험대>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다. 1991년 <인간시장3> 이후 13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그는 <귀신이 산다>에서 예전처럼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변영주 감독의 <발레교습소>에서는 주연인 윤계상의 아버지로 출연한다. 필기에게 연신 추파를 던지는 슈퍼 아줌마로 출연하면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황석정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출신으로 <날 보러 와요> <상사주> 등으로 대학로 무대에 올랐으며, <정글쥬스>에서 갈매기파 우두머리로 나오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마지막 늑대> <바람의 전설>에서도 인상적인 조역을 맡았다. 장 반장 역의 장항선이나 필기 아버지 역의 윤문식, 연화 남편 역의 장현성 등도 영화의 맛깔을 살려주는 데 큰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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