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꼴찌 투수, 에이스 배우, <슈퍼스타 감사용>의 이범수
2004-09-16
글 : 박혜명
사진 : 이혜정

이범수는 알고 있다. <슈퍼스타 감사용>의 감사용 역이 다른 어떤 배우보다 자신에게 어울려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말이다. 그가 맡은 감사용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19연패라는 불패의 기록을 가진 꼴찌 야구단 삼미 슈퍼스타즈 안에서도 꼴찌 투수였다. 그는 좌완투수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기용돼 팀의 패전처리를 전문으로 담당했고, 1승15패1세이브를 5년의 전적으로 남겼다. “비슷한 부분이 있죠. 그 사람은 무명 시절을 오래 거쳤고, 저도 조·단역 시절이 길었으니까.”

오랜 단역 혹은 조연 시절. 이범수에 관한 기사를 읽다보면 여전히 발견되는 구절. 이 구절을 아직까지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돌리고 돌려서 물었다. ‘오랜 조연 시절’류의 질문에 지겹게 시달려와서 혹시나 덮어놓고 예민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섣불리 말이 이어지지 않아 한참을 더듬거렸다. 긴 질문이 끝나자 이범수는 무슨 얘긴지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제가 항상 느끼는 부담이 있어요. 입장에서 오는 부담인데, 제가 인터뷰에 아주 성실하게 임하든, 전날 밤새도록 술마시고 최악의 컨디션으로 와서 건성으로 대답하든, 글을 쓰는 사람은 결국 기자잖아요. 그 사람의 입장, 견해, 사고에 의해서 기사가 써지니까, 나온 글들을 보면 내 의도는 항상 변형이 돼 있어요. 거기서 오는 갭이 저한텐 정말 공허하게 느껴져요. 정말로. 저는 제 기사를 제가 직접 쓰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니깐요.”

이렇게 시작된 이범수의 대답은 죽 이어졌다. 기나긴 그의 대답을 들으며, 한 질문을 갖고 30분 동안 대답을 이어간 배우가 또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차라리 커리어가 없는 배우들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커리어가 전혀 없으면 조연이나 단역 시절 얘기만 물어보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나는, 나한테 질문하는 사람이 지금의 나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인터뷰를 하러 온 무성의한 사람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시비로 그러는 건지 어리둥절할 때가, 과거에 있었어요. 제가 처음 주인공을 한 게 <정글쥬스>인데, 그때부터 <몽정기> <일단 뛰어> <싱글즈> <오! 브라더스> <안녕! 유에프오> <슈퍼스타 감사용>까지 주인공을 한 것만 7편이에요. 근데 왜 저는 항상 십몇년 전으로 얘기가 거슬러올라가서…. 다른 배우들은 주연 두세편만 해도 그런 거 안 물어보잖아요. 주연 두세편 한 것만 갖고도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데, 주연을 7편한 저는 그것만 갖고도 할 얘기가 얼마나 무궁무진하겠어요. 제가, 요즘 좋은 단어를 떠올렸어요. 비주얼적으로 좋은 배우들. 그런 배우들한테는 눈앞에 있는 화려함만 가지고 이야기하지, 너 이거 하기 전에 배 안 고팠느냐, 어디 가서 뭐 안 얻어먹었느냐 그런 질문 안 해요. 이제 이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무명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할 거예요.” 얼마 전 또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 얘길 꺼내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할 때 쓰는 상투적인 문구를 그가 또 하나 이야기한다. “그런 거 있잖아요. 뭐, 이미지가 순박하고 소탈한 그는 영화에서 보면 어쩌고저쩌고…. 진짜 길게 써놓는데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딱 이거예요. 얼굴은 별로지만 연기는 잘한다. ‘결코 미남은 아니지만…’, 그런 얘기도 나한테만 하잖아요.”

가끔씩은, 한쪽으로 기운 시선이 만든 “간극”을 “장난기로든 무성의함으로든 쿨함으로든” 메우고 싶을 때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또는 정반대로, 그 시선들 앞에 “나를 알아주십사라고 떠들고 싶지 않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범수가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오래전에 꿈을 이룬 사람의 여유로운 응수도 아니고 ‘맘대로 생각하시지요’ 식의 냉담한 무성의는 더더욱 아니다. 그는 영리한 대화의 기술이나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연마하기에 지나치게 뜨겁고 솔직한 캐릭터다. “저쪽에서 먼저 지르는 걸 어떡해요. 그러니까 저도 같이 지르는 거죠.” 그는 이범수란 배우가 관객에게 어떻게 어필하고 있는지를 말했다. “저도 놀랐는데, 저번에 <오! 브라더스> 때랑 이번에 <슈퍼스타 감사용> 할 때 설문조사를 했는데 저에 대한 호감도가 상당히 높더라고요. 안티가 없어요.” 멋내는 것도 좋아한다고, 정장 차림을 특히 좋아해서 갖고 있는 정장만 80여벌이라는 그는, 선글라스가 멋지다는 칭찬에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 듯 씩 웃는다.

사진촬영을 다 끝내고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전하는데 “너무 치열하게 쓰지 말아주세요. 저 이제 그만 치열해도 돼요”라며 그가 능청을 부리듯 웃음으로 당부한다. 그러나 “이거는 꼭 써주세요”라며 신신당부한 말들을 옮겨논 것만으로도 이미 행간의 흥분지수는 부쩍 높아진다. 게다가 “어느 시나리오나 욕심이 나죠. 어느 시나리오나 나한테 맞는 것 같고 또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라는 자신감과 욕심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다. 치열한 터널을 지나 원하는 곳에 도착해 있다는 능청스러운 여유는 한순간에 가려져버린다. 누구도 꺾기 힘든 이범수의 자기신뢰와 자신만만함과 의욕은 한바탕 달리기를 한 사람의 심장처럼 세차게 팔딱인다. 그는 아직도 신인 같다. 새파란, 청춘 같다.

의상협찬 제너럴 아이디어 by bum sukENSUVAN 옴므, 카운테스 마라, 얼진 스타일리스트 이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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