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여친소>의 여경진
2004-09-17
글 : 정이현 (소설가)
긴머리 풀풀 날리며 감춰진 소수의 욕망‘재복 페티시즘’ 을 깨우다

<여친소>가 한 편의 길고 지루한 CF라는 사실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자니, 심히 의문스러워 뒷골이 지끈거릴 지경이다. 저렇게까지 해서 도대체 뭘 팔려는 거지? 떠먹는 요구르트? 긴 머리 전용 샴푸? 아니면 혹시 여배우 전지현? 아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모두모두 틀렸다. 이 영화의 주력 상품은 바로, ‘유니폼’ 이다. 그렇다. <여친소>는 유사 이래 가장 거창한, 여자경찰 제복에 대한 한편의 상업 광고다. ‘여경제복 페티쉬’를 가진 대한민국 및 중화권 성인남성이 주요 소구대상이다.

건전하고 반듯한 양지의 세계만 지향해 오신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혹은 모르는 척 하고 싶겠지만, 세상에는 오만 가지의 성적 취향이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제복 페티시즘’ 이다. (일부에서는 ‘변태’ 라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용어로 뭉뚱그려 지칭하기도 하지만 그 단어의 정치적 의미를 꼼꼼히 따지는 거야 내 권한 밖의 일이다.) 여고생의 세일러복에서부터 간호사의 하얀 원피스에 이르기까지 어떤 제복을 입은 여성을 통해 판타지와 자극을 맛보는지는 남성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제각각 다를 것이다. 어쨌든, 애국시민의 입장에서는 유감스럽고 불경스러운 일이지만, 민중의 지팡이 경찰복을 입은 여자에 대해서도 모종의 은밀한 마음을 품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여자, 이름부터 노골적인 ‘여경진’ 이다. 취미는 시시때때로 경찰정복입고 거리 배회하기, 수상해 보이는 사람 아무나 따라가기, 수갑열쇠 잊어버리기, 담배 피우는 고등학생 죽도록 패기 등등이 있다. 무고한 시민을 범죄자로 몰아 훤한 대낮 파출소 안에서 폭력을 자행하고도, “내 사전엔 미안해, 라는 말은 없어. 그 말 듣고 싶으면 네가 미안해, 로 이름을 바꿔.” 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구경꾼 입장에서도 입술이 바짝 마른다. 아, 쟤가 미쳤나. 때가 어느 땐데. 저거저거, 소문나면 경찰청 인터넷사이트 마비될텐데. 하지만 우려는 금물! 감색 제복 안에 아름다운 몸을 감춘 채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우리의 전지현, 아니 여경진 양은 진짜 여경이 아니라 단지 여경 역할놀이 중일 따름이니. 상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상황도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것이 CF라는 장르의 규칙이다.

좌충우돌, 황당무계, 비련 모드를 숨 가쁘게 오가는 여경진의 캐릭터를 분석하는 일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CF에 캐릭터 있는 거 봤어? 물건만 많이 팔면 장땡이지.) 바지제복, 치마제복, 수사관의 트레이드마크인 가죽재킷, 심심하면 갈겨대는 권총까지 소품을 완벽하게 갖춘 채 이루어진 이 비싼 코스프레에 ‘제복 매니아’들은 얼마나 흐뭇했을까? 제 성적 기호를 골방에 꼭꼭 감춰야했던 일부 페티시스트들의 욕망을 백일하에 공포해 주었다는 측면에서 어쩌면 <여친소>는 CF를 빙자한 ‘소수자의 인권’에 관한 영화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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