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한겨울 탄광촌에서 봄을 발견한 남자, <꽃피는 봄이 오면>
2004-09-21
글 : 김현정 (객원기자)
한겨울 탄광촌, 춥고 외로운 그 마을에서 뜻밖의 봄을 발견한 남자.

일년 내내 여름만 있는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단어로 희망을 표현할 수 있을까. 늦가을에서 봄을 향해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꽃피는 봄이 오면>은 정직한 제목 그대로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영화다. 겨울이 가고 나면 봄이 오겠지. 이를 악물지 않아도, 시간을 앞당기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꽃피는 봄이 오면>은 이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환희로 솟아오르는 기복없이 한 남자의 세 계절을 연필 스케치처럼 담담하게 담아내려 한다. 절망조차 하지 못하고, 체념만 웅크리고 있는, 지리멸렬한 인생. 그러나 밋밋하고 초라할 뿐이던 그 남자는 긴 겨울을 견디면서 봄을 봄으로 느낄 수 있는 에너지에 조금씩 연료를 더해간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현우(최민식)는 재능은 없어도 자존심은 있는 트럼펫 주자다. 돈을 위해 음악을 하면 안 된다고 믿는 그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밤무대에 서는 일만은 끝내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떠나보낸 옛 연인 연희(김호정)가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던 날, 현우는 강원도 탄광촌에 있는 중학교 관악부 교사 자리에 지원한다. 제대로 소리도 나지 않는 악기를 들고 오종종 모여 있는 아이들. 현우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서 할머니와 살고 있는 재일이나 케니 G처럼 유명해지고 싶다는 용석이를 가르치면서 아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눈이 맑고 예쁜 동네 약사 수연(장신영)도 은근하게 그의 마음을 건드려온다.

<꽃피는 봄이 오면>은 퇴직한 뒤에 시골로 내려가서 도계중학교 관악부를 지도한 어느 교사의 실화와, 폐광촌 아이들과의 1년을 기록한 TV다큐멘터리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헌신적인 교사에게 찬가를 선물하는 <홀랜드 오퍼스> 혹은 광부들의 투쟁과 브라스 밴드를 결합한 <브래스드 오프>가 떠오를 만도 하다. 그러나 <꽃피는 봄이 오면>은 탄광촌과 밴드와 교사라는 설정과는 별다른 인연을 맺지 않는 영화다. 현우가 쉬고 가는 도계는 탄광촌이면서도 검은 먼지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순한 마을이다. 자잘한 상처가 쌓여 가슴속에 눈물이 고인 그는 도계에 오자마자 “잘 데는 있으세요?”라고 묻는 속 깊고 착한 아이의 얼굴과 마주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김치없는 라면도 그러려니 먹어주고, 돈은 나중에 줘도 괜찮다면서 떡봉지를 들려보내고, 주먹다짐도 합의가 아니라 사과로 해결한다. 어쩌면 도계는 감독이 꿈꾸던 공간이 아니었을까. 마치 현우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한 듯한 이 공간은 환상으로 울타리를 두른듯 비현실적이고 숨이 막힐 정도로 아무 일도 없다. “막장 인생이 내 꿈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광부는 곧바로 사라지고, 한참 고민많을 나이의 아이들은 교사와 대화를 하는 대신 악기만 불어댄다. 단 한번도 위기를 향해 급경사를 타지 않는 <꽃피는 봄이 오면>은 수연이 왜 나오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연애에도 무관심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조감독을 했던 류장하 감독은 그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오로지 현우의 발걸음을 쫓으면서 조용한 어조를 유지한다. 드라마틱한 삶과는 거리가 먼 남자 현우. 그는 연희와 수연 두 여자와 마음을 주고받는 듯 보이지만 생을 뒤흔드는 로맨스를 만들지는 못한다. 현우가 서울대를 졸업했다고 믿으면서 열심히 연습하는 아이들에게도, 그는 분명한 미래를 주지 못하고, 하다못해 단 한번의 우승마저도 주지 못한다. 똘망똘망한 아이에게 “내가 니네한테 우승할 수 있다고 하면 그건 사기치는 거야”라고 말하는 현우는 살아가는 법보다는 포기하는 법을 가르치는 편이 어울리는, 자격미달의 교사다. 영화에 등장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는 한다. 커다란 절망없이도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절정에 올라본 적 없어도 패배는 쓰라리다. 잘게 할퀴고 간 삶의 무수한 흔적은 어느 순간 깊게 찌른 칼자국만큼이나 치명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우는 꽃잎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서 환하게 웃는 봄을 맞는데,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매우 궁금해진다.

현우가 봄을 맞기를 기원하는 <꽃피는 봄이 오면>은 초상화 같은 영화다. 모나리자 뒤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현우 주변에 배치된 이들의 사연도 희미하게 밀려나곤 한다. 할머니에게 트럼펫을 들려주겠다면서 악보를 받아가는 재일, 꿈과 현실의 간격을 두고 다투는 용석 부자, 얹혀사는 아들에게 싫은 소리도 자주 못하는 현우 어머니, 진폐증에 걸린 아버지 때문에 탄광촌에 주저앉은 수연, 답답한 남자를 끝내 떠나지 못하는 연희. 현우와 교감하면서 포근하게 날실과 씨실을 엮어가야 할 그들은 세심한 배려를 받지 못하고 영화 여기저기에 툭툭 던져지곤 한다. ‘꽃피는 봄’이 오직 현우만을 위한 계절로 느껴진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꽃피는 봄이 오면>은 어른스럽게 자신을 책임지지 못했던 한 남자가 작은 둔덕을 오르듯 조금은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영화이고,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 조연 배우들

적절한 연기의 균형을 잡아낸 그들

<꽃피는 봄이 오면>은 최민식이 유일한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 안에서 중견배우 윤여정은 “이름도 없는 그냥 현우 엄마” 역을 맡아서 대등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서른이 훌쩍 넘도록 엄마 집에 얹혀사는 아들을 구박하면서도 고운 말투를 잃지 않는 윤여정은 엄마이면서 여자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일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 <나비>의 김호정은 누나처럼 차분한 태도로 현우 곁에 머무는 오래된 연인 연희로 등장한다. 오래간만에 영화에 모습을 보인 김호정은 좋았던 시절이 지나간 뒤에 남은 사랑을 쓸쓸하면서도 삭막하지 않게 연기했다. 현우가 새로 만나게 되는 여자 수연은 영화에 처음 출연한 장신영.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최민식과 호흡을 맞춘 장신영은 귀엽게만 보일 수 있었던 함정을 벗어나 균형을 잡았고, 수연을 좋아하는 동네청년 주호를 연기한 김강우와도 꽤 잘 어울린다. 드라마 <나는 달린다>로 얼굴을 알린 김강우는 주먹질을 하기도 하지만 제정신일 때의 깍듯하고 순진한 태도가 더 제것처럼 보이는 배우. 얼마 전 정재은 감독의 <태풍태양>에 캐스팅됐다. 아들이 음악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탄광 앞에서 비맞으며 연주하는 관악부원들을 보고 마음을 돌리는 용석 아버지는 연극배우 최일화가 연기했다. 영화 <케이티> <선택>에도 출연했던 그는 얼마 안 되는 분량이지만 험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고민을 뚜렷한 목소리 안에 실어냈다. 이 많은 어른들보다도 더 비중이 있는 배우는 재일 역의 이재응이다. 막 변성기를 맞았는지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한 이재응은 <선생 김봉두>의 소석이, <효자동 이발사>의 나강이로 인상을 깊이 새겼고, <꽃피는 봄이 오면>에서도 어눌한 듯 속이 깊고 어른스러운 말투로 눈에 띄는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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