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주눅 든 남자들에게 선사하는 백일몽, <스텝포드 와이프>
2004-09-21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그 많은 잘나가던 여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스텝포드에서 쓴물 다 빼고 단물만 남은 바비인형으로 살고 있다네.

‘말 잘 듣고 예쁜 아내.’ 그건 남자들의 실로 오랜 꿈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들의 꿈은 ‘돈도 잘 버는 말 잘 듣고 예쁜 아내’로 업그레이드된다. 그리하여 등장한 ‘슈퍼우먼 콤플렉스’. 더욱 피로한 인생을 살게 된 건 여자들이요 그 콤플렉스의 수혜자는 남자들이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다른 모든 조건은 기꺼이 발전시키면서도 오직 ‘말 잘 듣는 것’만은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아내들이 있다. 그러자 잘나가는 아내들에게 언제나 딸려오는 부록, 주눅든 남자들이 큰 맘 먹고 비굴한 혁명을 시작한다. 아이라 레빈의 소설을 영화화한 1975년의 <스텝포드 와이프>는 끔찍했지만, 2004년의 그것은 웃긴다. 공포 대신 코미디를 선택한 시도는 미리 말하자면 싱겁기 그지없는 오락영화로 귀결되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방송사 사장 조안나 에버트(니콜 키드먼)는 단 한번의 억울한 사고로 해고를 당한다. 부사장이자 조안나의 남편이기도 한 월터(매튜 브로데릭)는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고 조안나와 아이들을 데리고 스텝포드로의 이사를 결심한다. 깊은 우울증에 빠진 조안나에게 스텝포드의 주민들, 특히 여자들의 지나치게 상냥한 행동과 인형 같은 외모는 하나같이 ‘비현실적’이다. 월터 역시 스텝포드의 권위적인 남자들에게 점차 물들어가기 시작할 무렵, 조안나는 스텝포드의 아내들이 한때는 사회적으로 매우 촉망받던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텝포드를 둘러싼 음모는 점차 밝혀지기 시작한다.

못되고 기세등등한 아내를 현모양처 로봇으로 만들기. 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소름끼치는 소재가 미지근한 영화로 돌변한 데에는 영화가 차용한 코미디라는 장르가 ‘센’ 주제를 적절히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영화가 유발하는 웃음은 덜떨어진 세태에 대해 이중으로 걸러진 날카로운 풍자가 아니라 인물들의 직접적인 대사나 표정에 의지한 순간 오락용에 가깝다. 스텝포드의 아내들이 선보이는 획일적인 상냥함은 화사함 속에 피를 감춘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다가오기보다 그냥 단순히 바보 같을 뿐이다. 화려한 캐스팅과 세트, 그 안의 ‘알고보니’ 상류층 여성들에게는 시종일관 돈 냄새가 풀풀 난다. “아무도 완벽할 수는 없다”고 세상 여자들을 ‘감히’ 계몽하는 니콜 키드먼은 무척이나 완벽해 보인다. 애초 스텝포드는 현실고발용이 아닌 잘나가는 아내들이 주눅든 남자들에게 선사한 백일몽이 아니었는지. 당연히 그녀들에게 가부장제를 뒤집는 반란이 어울릴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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