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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팔리는 애들에게 고함, <팻 걸>
2004-09-22
글 :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조숙했으니 조로할밖에.”

누군가 ‘늙은이’ 같다고 놀리면 받아치는 나의 대답이다. 나의 10대도 <팻 걸> 아나이스의 사춘기처럼 콤플렉스로 가득했다. 팻 걸은 아니었지만, 큐트 보이도 아니었던 관계로 나의 사춘기는 우울한 나날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뚱녀 아나이스가 허공을 응시하면서 “만약 내가 꿈꿀 상대를 찾을 수 있다면 살았든 죽었든 남자든 시체든 짐승이든 상관없는데…”라고 중얼거리듯이. 신윤동욱 소년은 언감생심 꿈꿀 상대를 찾을 수 있다, 는 기대를 차마 품지 못했다. 더구나 조숙한 소년은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나도 시도도 해보기 전에 비관해야 하는 아나이스의 절망감을 조금은 안다. 그래서 <팻 걸>을 보면서 아름다운 엘레나의 섹스신보다 외로운 아나이스의 읊조림에 눈길이 쏠리고, 마음이 끌렸다.

사랑의 불가능성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의 철학자가 된다

카트린 브레이야 감독의 <팻 걸>은 뚱보 동생 아나이스와 예쁜 언니 엘레나의 첫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고등학교 1학년인 엘레나는 여름 휴양지에서 만난 어떤 대학생 오빠와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엘레나보다 두살 어린 아나이스는 언니와 오빠의 생포르노그라피를 감상한다. 엘레나는 아나이스와 같은 방을 쓰지만, 아나이스를 없는 존재로 여기고, 오빠를 방으로 끌어들여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오빠의 엄마가 찾아오면서 엘레나의 첫 경험이 들통난다. 그리고 충격적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나에게는 혼란스럽기만 했던 결말로 마무리된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뚱녀 아나이스에게 나의 모든 콤플렉스를 감정이입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무지한 나에게 감독이 재구성하려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아나이스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에만 신경이 쓰였다.

콤플렉스는 사람을 늙게 한다. 콤플렉스를 가진 자들에게 살아가는 일 자체가 시련의 연속이고, 박탈감의 나날이기 때문이다. 예쁜 언니 엘레나는 “(첫 경험을)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지”라는 낭만을 품은 꿈 많은 소녀지만, 뚱보 동생 아나이스는 “첫 경험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해야 하는 거야”라고 충고하는 애늙은이다.

아나이스의 깨달음은 끝이 없다. “여자는 비누가 아니기에 섹스를 아무리 해도 닳지 않는다. 오히려 성숙해져서 당신에게 기쁨을 준다”, “난 심장을 창가에 걸어 썩어가게 했네. 까마귀가… 쪼아먹었으면 좋겠네”. 어린 성녀는 영화 내내 심오한 통찰을 마구 쏟아낸다. 사랑의 불가능성을 절절히 느껴본 사람들은 사랑의 철학자가 된다.

나는 ‘안 팔리는’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시대의 진정한 소수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서른이 넘도록 끝끝내 안 팔리는 나는 연애전선에서 패배한 동지들에게 뜨거운 자매애를 느낀다. 거의 본능적이다. 그의 치명적 약점이 뚱뚱한 몸이든 못생긴 얼굴이든 까탈스러운 성격이든 그들을 보면 밀려오는 연대의식을 주체할 수 없다. 낭만적 사랑의 시대에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본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동정받지 못하는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뚱보 아나이스와 신윤동욱은 자매다. 영화의 원제 <나의 누이에게>를 빌리자면 이 글은 나의 누이, 아나이스에게 보내는 편지인 셈이다.

나는 취향의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다. 연애시장에는 재고가 없다는 말은 사기라고 생각한다. 한번 팔리면 영원히 잘 팔리고, 안 팔리는 것들은 끝까지 안 팔린다. 이것이 내가 아는 연애시장 불변의 법칙이다. 뚱뚱한 몸을 사랑해주는 왕자님이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시대의 남성에게 그런 과분한 기대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성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왕자님이 나타날 것이라는 환상을 유포하느니 차라리 <팻 걸>의 광고카피 ‘잔 것은 언니였지만 느낀 것은 나였다’ 같은 빙의를 기대하는 편이 낫다.

물론 <팻 걸>에서도 빙의는 일어나지 않는다(속았다). 영화는 오히려 달콤한 환상을 철저히 깬다. 카트린 브레이야 감독은 왕자님 대신 강간범을 등장시켜 아나이스의 첫 경험을 앗아간다. 엘레나의 첫 남자는 어머니의 반지를 훔쳐 엘레나에게 선물한 도둑놈임이 드러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 같은 ‘안 팔리는’ 애들에게 작가가 의도한 낭만적 사랑에 대한 조롱은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낭만적 사랑을 깨부수는 마지막 반전을 짧은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좌절된 욕망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영화가 끝나고, 나의 머리 속에는 비록 훔친 반지를 선물받더라도 사랑받고 싶은 놈에게 사랑받아보고 싶다는 솔직한 욕망만이 남았다. 김중배의 다이아반지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치사한 다이아반지도 조금은 부러운 법이다. 아마도 내 친구들이 이 영화를 봤다면 ‘그래도 엘레나는 잘생긴 놈이랑 잤잖아. 그게 남는 거지 뭐’라고 단칼에 정리했을 것이다. 그 끈질긴 욕망 앞에 “살찐 여자 두번 죽이는 영화”(영화평론가 황진미)라는 비판도, “카트린 브레이야의 영화를 보면 비로소, 나는, 여성이 된다”(영화평론가 심영섭)는 상찬도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나의 꿈: 안 팔리는 애들을 위한 인권운동

영화관을 나오면서 잊고 있었던 꿈이 생각났다. 내가 정말 해보고 싶은 운동이 있다. 공식명칭은 ‘연애 약자들의 인권운동’이고, 풀어 쓰면 ‘안 팔리는 애들의 한풀이’가 된다. 낭만적 사랑이 만인의 강령인 세상에서 연애 한번 못해본 사람들만큼 약자 중의 약자는 없다. 더구나 연애에 실패했거나 상처받은 사람까지 끼워넣으면 이 운동처럼 대중적인 운동도 없다. 다수자가 피해자가 되는, 아주 탄탄한 기반을 가진 ‘장사되는’ 운동이다. 내 주변에만 해도 이 운동의 발기인으로 동참할 사람들이 많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아직도 성경험이 없다고 ‘짐작되는’ 어떤 ‘언니’, 그의 별명은 ‘미개봉 문제작’이다. 지난 1년 동안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영화감독의 닉네임은 ‘저주받은 졸작’이다. 참, 3인조 드랙퀸 쇼단 ‘안 팔리나 시스터즈’도 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 운동은 앞으로 더욱 전망이 밝은 운동이다.

새삼스럽게 안 팔리는 안 좋은 추억을 되새기면서 영화관을 나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앉아서 나의 첫 경험을 생각해보았다.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돼서? 아니다. 도통 나의 첫 경험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어떤 ‘부위’의 경험을 첫 경험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는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성기 삽입만을 첫 경험으로 여기지 않는 부류도 있다. 버스에서 심란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앞 좌석의 남녀가 “다정도 병인 양하며”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문득 “나는 죽어서도 심심할 것”이라는 아나이스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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