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장금이와 금자씨, 그사이 어딘가, <대장금>의 이영애
2004-09-23
글 : 오정연

“<공동경비구역 JSA>의 포스터 촬영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영애씨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 한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나한테 말걸지 마시오’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사진작가 오형근)

“한번도 인간적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겉에서 보이는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하면 된다.”(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최형인)

“아무리 촬영이 힘들어도 단 한번도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아무래도 같이 작업하는 후배 연기자나 스탭들은 어려워하기도 했다.”(<대장금> PD 이병훈)

솔직히 말하자. 모두들 언급하는 한결같은 차분함. 그뒤의 무언가, 이를테면 처음 만난 남자에게 라면먹고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던 모습 같은 난데없음이, 그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 내리는 적막한 오후. 끝없이 이어질 듯한 계단을 내려가야 도착하는 붉은 방으로, 이영애를 만나러 가는 내내 예상 밖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사진 촬영 내내 단 한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이는 그를 보며, 새삼스럽게 호기심이 증폭됐다. 분장을 바꾸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그 순간 하얀 얼굴 가득 거짓말처럼 미소가 번진다. “아무래도 외모 때문인지, 좀 차가워 보인다는 분이 많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먼저 웃고, 먼저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나 작업을 하다보면 시작은 좋았는데 나중이 안 좋은 것보다 시작은 차가웠는데 끝이 좋은 게 더 낫잖아요. 느긋하게 서두르지 않고 다가가려고 노력해요.” 그러나 여전히, 비현실적인 갈색 눈동자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아마도 불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대장금>으로 전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그가 잔혹한 핏빛 복수를 가슴에 품은 여인의 이야기 <친절한 금자씨>를 차기작으로 선택한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유괴와 <올드보이>의 감금의 코드를 결합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 삼부작의 결정판이 될 것이라는 이 영화.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된 여인 금자가 출감 이후 벌이는 치밀한 복수, 그 끝에서 맞닥뜨리게 될 선택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출감 이전과 이후, 금자의 급격한 변화를 믿게 만드는 건 온전히 이영애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셈이다. 문득, 여태껏 영화 속 그에게서 감정 기복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여태껏 둘 이상의 남성 캐릭터들이 연기했던 ‘박찬욱표 영화’를 원톱으로 끌고 가야 하는 상황. 촬영 중간, 필름을 갈아끼우고 세팅을 바꾸는 적막한 순간에도 정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에게 만만찮은 프로젝트를 앞둔 심경을 물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영화를 선택한 계기였어요. 시나리오를 받아본 직후 힘든 영화가 될 것임을 직감했지만 모험을 감행할 만큼 감독님을 믿으니까요.” 한치의 곁도 주지 않는 담담한 대답. 분명 그는 감정의 변화 곡선을 말이나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카메라를 앞둔 그에게서 각종 CF 속에서는 절대로 감지되지 않았던 일말의 이질적인 위태로움이 배어나왔다. 그것은 좀처럼 웃음을 주문하지 않았던 사진작가의 연출 때문이 아니었다. 그 순간. 언제나 생글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던 장금에서 순식간에 웃음을 지워버린 친절한 금자에게로. 이영애가 한 발짝 가까워져 있었다. 그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공기의 변화와도 같았다.

<올드보이> 못지않게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될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오는 11월 촬영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영화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영애 최고의 도전작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금자는 정말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에요. 보통 사람들이 A에서 B로 감정이 변할 때, 금자는 바로 F로 건너뛰거든요. 그냥 언뜻 봐서는 동기부여가 쉽지 않은 편이죠.” 그러나 이영애는 박찬욱 감독의 말에 따르면 “모두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친절한 금자씨>의 시나리오 1고를 마음에 들어했던 유일한 사람”이고, 이병훈 PD에 의하면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연기를 요구하면 절대로 듣지 않는 야무진 배우”다. 그런 그가, 금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조용히 말한다. 돌이켜보면, 시커먼 군인들의 세계에서 꼼꼼하게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면서도 말 못한 가족사를 품고 있던 소피부터 어떤 이유에선지 사랑을 믿지 않게된 듯 보이던 이혼녀 은수와 각종 약초 이름과 전문 한의학 용어를 야무지게 읊어대면서도 복수의 칼날을 늦추지 않던 장금이까지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단 한번도 남들에게 이해받기 위해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 속에서는 제대로 보여지지 않았던 은수의 속사정까지 결국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금자가 행하는 복수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이해시키려 할 모양이다.

인터뷰는 끝났고, 기대의 절반은 어긋났다. 영화적인 돌발상황도, 극적인 감정의 드러냄도 없었다. 남은 것은 그의 예민함이 간신히 포착된 사진이고, 얻은 것은 <친절한 금자씨>를 향한 기다림이다. 말로는 다 못할 복수의 처연함을 흔들림 없는 자신의 페이스로 표현해낼, 그의 금자에 대한 궁금함 말이다.

사진 오형근·의상협찬 조르지오 아르마니, 캘빈클라인, 타임, 앤디앤뎁, 더슈, 다사끼, 다미앙, 타테오시안·의상 조상경·메이크업, 헤어 송종희·장소협찬 SUG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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