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비평 릴레이] <빌리지>, 허문영 영화평론가
2004-10-05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거짓‥거짓‥거짓‥끊임없이 관객을 비웃다

깊은 주름의 노인이 고개 숙인 청년에게 우아한 문어체로 침울하게 말한다. “슬픔으로부터 도피하려 하지 마라. 슬픔이 널 찾아낼 테니까.” 그들이 사는 마을은 첫눈에도 정상은 아니다. 해는 좀처럼 비치지 않으며,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이 노인과 청년처럼 슬픔에 젖은 얼굴로 천천히 말하고 느리게 걷는다. 그리고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깊은 숲과 스산한 안개에 감싸여 있다.

이 영화가 〈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과 〈싸인〉의 M. 나이트 샤말란의 작품임을 모르는 관객이라도 이들의 슬픔이 초현실적 존재와 연관돼 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하게 된다. 마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입 밖에 꺼내서도 안되는 존재”가 있음을 가르치며 그 존재가 이 마을을 휘감은 슬픔과 불안의 근원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빌리지〉는 〈식스 센스〉와는 달리 혹은 〈싸인〉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자기의 수수께끼를 또박또박 읽어주고 시작하는 영화다. 입 밖에 꺼내서도 안 된다는 그 존재의 정체는 무엇일까.(아래 내용에는 미리 알게 됨으로써 이 영화를 보는 재미가 반감할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됩니다.)

마을의 지도자 워커(윌리엄 허트)가 바란 건, 그리고 그와 함께 이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이 바란 건 상처로부터의 도피였다. 최후에 밝혀지는 사실은 그들은 소중한 가족의 일원을 악랄한 범죄로 잃은 뒤, 세상을 등지고 외딴 마을에 자신들을 유폐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이 사악한 저 너머의 세계와 영원히 만나지 못하도록 시대를 되돌린 뒤 공포의 신화를 조작했다. 그들의 소망은 판타지를 사는 것이다.

이 마을의 딜레마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문명의 악을 거부하는 순간 문명의 선도 포기하는 것. 시력을 잃어가는 아이를 보고도 치료를 하지 않았으며, 상처로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도 약을 구하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는 순수를 위해 거짓을 사는 것. 이 딜레마의 공동체는 거짓과 비겁을 모르는 해맑은 남녀의 사랑에 의해 도전받는다.

〈빌리지〉는 이 딜레마를 배가된 거짓으로 해결한다. 바리데기 설화처럼 버림받은 딸이 공동체의 영웅이 되는 신화적 서사를 더함으로써, 다친 청년은 회복하고 조작된 공동체 신화는 도리어 강화된다. 그러나 〈빌리지〉의 진짜 거짓은 그들이 거짓임을 자인하는 조작된 신화가 아니라, 그들이 진실한 표정으로 말하는 언어들이다.

마을 어른들이야말로 슬픔으로부터 도피한 자들이며, 그들이 말하는 순수는 종교적 구원이나 휴머니즘과 무관한 자기 방어일 뿐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거짓은 눈먼 딸이 “나, 이제 돌아왔어”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마을사람들의 벅찬 표정과 서정적인 음악으로 사랑과 진실의 위대한 승리처럼 치장되는 이 결말은 그들의 거짓이 더욱더 큰 거짓 없이는, 또한 조작된 신화로 고통 받는 자의 희생 없이는, 지탱될 수 없음을 자백하는 순간이다.

〈빌리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자기비평적인 영화로 다시 읽힌다. 〈빌리지〉의 표면상의 감동을 자아내는 노스탤지어, 퇴행적 판타지, 유아(唯我)적 언어에 대한 집착과 그것의 신화화는 대중영화의 오랜 속성이다. 대중 서사의 신화 구축과 그 유지의 메커니즘을 스스로 전시하는 〈빌리지〉는 거짓 눈물로 관객을 홀려놓고는 돌아서서 비웃는 잔인한 광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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