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아련한 그리움의 서정,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2004-10-05
글 : 박은영
그녀 없는 세상에서 중년이 된 남자, 카세트테이프로 교신하던 열여섯 그때로 돌아가, 넘치게 사랑하고 아프게 떠나보낸 첫사랑을 추억하다.

소녀는 소년보다 생일이 며칠 빨랐다. 그러니까 소년이 태어난 뒤에 소녀가 이 세상에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소녀가 죽어버리고, 소녀가 없는 세상에서 소년은 17년을 더 살았다. 함께했을 때 그들은 궁금해했었다. 사람이 죽으면 사랑도 죽는 걸까. 이제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소년은 어렴풋이 그 답을 깨우친다. 그리고 붉은 사막과 푸른 하늘, 시간도 문명도 사라진 태초의 진공 같은 ‘세상의 중심’으로, 해묵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난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새로울 게 없는 영화다. 찬란했던 첫사랑, 연인과의 사별, 남겨진 자의 슬픔을 다룬 전형적인 최루성 멜로드라마. 그런데 이 영화가 올해 일본에서 크게 사고를 쳤다. 원작소설이 3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역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가 싶더니 5월에 개봉한 영화는 한술 더 떠 7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롱런했다. “왜 잊게 되는 걸까. 소중한 것들이 많았는데.” 주인공의 회한어린 절규가 관객의 마음에 메아리쳤기 때문인 것 같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추억, 80년대 문화에 대한 향수를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가, 새삼 특별하게 다가간 이유.

유키사다 이사오(<고> <해바라기>)는 ‘뻔한 이야기’의 함정을 피해가기 위해 시간과 기억의 테마를 부각시키면서, 원작에는 없는 현재의 이야기를 병행했다. 그 소년 사쿠타로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 어느 날 약혼녀 리츠코가 ‘어딜 좀 다녀오겠다’는 메모만 남기고 사라진다. 리츠코가 향하는 곳은 우연히도 사쿠타로의 고향이다. 거기서 사쿠타로는 백혈병으로 떠나보낸 첫사랑 아키를 떠올린다. 그가 고향에서 마주한 것은 과거의 시간만은 아니다. 첫사랑을 평생 가슴에 품은 사진관 아저씨에게서 자신의 먼 미래를 보기도 한다.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풋풋한 첫사랑의 순간들이다. 어리숙한 사쿠타로의 스쿠터에 조숙한 아키가 올라타면서부터, 그들은 연인으로 맺어진다. “바짝 붙지 마.” “왜, 가슴이 붙니?” 하고 싶은 말을 녹음해서 들려주는 그들의 ‘음성 교환 일기’는 “나는 고로케에 간장 쳐서 먹는데, 너는 케첩 발라 먹니?” 같은 소소한 궁금증부터, “아침에 눈뜰 때 제일 먼저 너를 생각해”라는 열렬한 애정 고백까지로 깊어간다. 소니 워크맨, 심야 라디오 방송, 엽서 보내기 등 사랑의 디딤돌로 쓰인 80년대 청춘 문화의 상징들(원작엔 없는 설정)에는, 특히 그 시대를 거쳐온 관객을 흔들어놓는 정서적인 힘이 있다.

이야기부터 분위기까지 <러브레터>를 닮아 있던 영화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한국영화 <편지>나 <하루>를 연상케 하는 ‘최루탄’ 몇발로 확실한 차별화를 시도한다. 백혈병에 걸려 머리가 빠진 채로 무균실에 격리된 아키에게, 사쿠타로는 혼인 신고서를 내보이며 청혼을 한다. 유리창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안타까운 입맞춤, 호주 에어즈록으로 함께 떠나려던 공항의 풍경은, 이성적 판단을 앞질러 눈물샘을 먼저 자극한다. 통유리창에 흐르는 빗줄기의 그림자로, 카메라가 울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거나, 안개가 둘러쳐진 듯 뽀사시한 화면으로 아련한 그리움의 서정을 연출한 영상도 거듭 ‘눈물’을 권한다.

바랜 사진첩이나 예쁘장한 팬시상품을 거부하는 감독의 야심은 원작이 비워둔 ‘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것으로 나타난다. 단 하나의 사랑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 성인 사쿠타로의 이야기, 약혼녀 리츠코와의 인연 등을 끼워넣은 것은 현실에 대한 애착, 삶에 대한 긍정으로도 비친다. 우리 모두 소중한 많은 것들과 이별하며 ‘남겨진’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 그러나 리츠코를 비롯한 현재의 인물과 이야기가 ‘배경’처럼 ‘액자’처럼 어정쩡해 보이는 건, 그 시도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도피나 퇴행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는 힘’으로서의 추억을 말하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 일본의 세가지 신드롬

‘욘사마’를 제친 상반기 히트 상품

일본 언론이 선정한 올 상반기 히트 상품 목록에서, ‘욘사마’를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였다. 가타야마 교이치의 소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출간 당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고> <배틀로얄>의 시바사키 고가 한 인터뷰에서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소설”이라 극찬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3년 6월부터 35주간 문예서적 판매 1위를 놓치지 않은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갖고 있던 역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 기록(259만부)을 뛰어넘어, 320만부까지 팔려나갔다. 과거 연애와 이별 이야기에 집중한 소설과 달리 어른이 된 현재 이야기를 추가해 각색한, 유키사다 이사오의 영화 버전도 지난 5월 개봉 이후 700만 관객 동원이라는 심상찮은 열기를 이어갔다. 이어 일본 TBS에서 7월부터 3개월간 11부작 주간드라마로 제작 방영해, 일본은 물론 국내의 일본 드라마 팬들 사이에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TV드라마는 과거의 순애보를 상세히 들려주는 데 집중했다는 점에서 영화보다 원작소설에 더 밀착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바사키 고는 소설을 열렬히 지지한 것은 물론, 영화 버전에 리츠코로 출연하고, TV버전에서 주제가를 부르는 등 남다른 인연과 애정을 과시한 바 있다.

‘세가추’(일본어 제목을 줄여서 부름)라 부르는 이 신드롬의 파장이 워낙 크다보니 문화적 사회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단카이 주니어 세대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우세한 분석. 단카이 주니어 세대는 1972년부터 76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로, 그들이 어린 시절을 보낸 70년대와 80년대에 관련된 문화 상품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는 워크맨, 라디오, 엽서 등으로 그들의 향수를 적절히 자극했다는 얘기다. 우울하고 각박한 세태에 대한 반작용이라거나, 10년 단위의 순회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70년대 <러브 스토리> 이래 최대의 순애보 붐이라는 ‘세가추’ 신드롬은, 비슷한 시기 <겨울연가>의 인기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내에선 싸이더스 HQ가 판권을 사들여 리메이크를 준비 중이며, 원작영화의 감성을 가장 잘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윤석호 PD가 연출자로 내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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