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민을 기만하는 공갈빵의 예술 <연인>
영화는 잇따라 기대어놓은 ‘검’을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편 <영웅>에서 진시황으로 하여금 살생의 도리를 깨닫게 해주었던 붉은색의 찬연한 ‘검’(劍)자 대신 육중하고 쇳소리나는 진짜 칼이 여기 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서 좋았냐’는 양자경의 말에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니, 더욱 잃어버린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와호장룡의 검을 기억하는가? 그러나 <연인>의 검은 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채우기 위해 지금 칼집에 꽂혀 있다. 허무가 사라진 자리, 꽉 찬 칼들의 춤이 화면을 메우고, 영화는 막 눈먼 소녀의 신기에 가까운 춤 솜씨와 콩알을 던져 그것의 방향을 맞추는 신선의 길안내라는 메아리 게임의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거기엔 색이 넘쳐나고 소리가 넘쳐나고 장이모는 시청각적 쾌감으로 충만한 유희하는 액션의 과녁에 정확히 칼끝을 가져다댄다.
할리우드 공산품에 가까운 중국형 블록버스터
칸에서 처음 <연인>을 보았을 때, 나는 아마도 무협영화의 틀 내에서 최대한 <연인>을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검을 던지면 열댓명의 무사가 그대로 땅 위에 뒹구는 ‘칼 한번에 파리 열 마리’식의 역발산기개세의 허장성세가 시각화되는 장소로써, 무협영화의 등기부등본 내에 <연인>을 두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뒤 한국에 다시 돌아와 제정신 차리고 본 <연인>은 ‘선’과 ‘면’의 예술로서 무협영화의 맥을 다 잘라놓은 팔다리 없는 국적 불명의 무협영화에 불과했다. 전작인 <영웅>이 그 열등감의 근원을 리안의 <와호장룡>에 두고 있는 듯싶다 했는데, 솔직히 이번 <연인>은 단검이 총알처럼 사용된 CG로 도배한 <매트릭스>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일단 <연인>은 철저히 할리우드영화의 편집술 방식을 따른다. 기존의 무협영화에서처럼 와이어 액션에 의한 유장한 동선의 맛을 살리려면 필연적으로 인물을 배경 안에 보여주는 익스트림 롱숏이 필수적이다. 물 위에서, 사막에서 거의 발레에 가까운 동선이 긴 와이어 액션을 선보였던 <영웅>과 달리 <연인>에서는 그러한 롱숏 장면들이 거의 없다. 오히려 지극히 서구적인 화술로 관군과의 싸움에서는 들고찍기 방식이 도입되는가 하면, 꽃밭에서의 결투신에는 줌아웃으로 전체를 보여준다. 그 어떤 무협보다도 배우들의 얼굴 클로즈업투성이에, 정소동의 무술은 발기부전인 양 슬로모션으로만 각을 세우고, 무사의 칼은 관객을 향해 날아가는 변칙적인 연출로 허공을 가른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칼은 베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찌르는 데 쓰인다. 영화에서 관군들은 장검을 쓰지만 비도문으로 일컬어지는 비밀결사들은 단검을 쓴다. <연인>은 아주 축약해 말하자면 <매트릭스>처럼 정부군과 역모를 꿈꾸는 지하집단과의 싸움, 즉 장검과 단검의 싸움이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냐 하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눈보라 치는 벌판에서의 맞대결은 무협영화의 맞대결이라기보다 서부극의 그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기실 <연인>은 리드미컬한 편집에 빚을 진, 액션이란 총알을 꽉 채운 할리우드의 공산품에 가까워 보인다. <연인>은 중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의 모든 것이다.
색과 소리의 쾌감 그뿐, 무협의 비장미는 증발해
그렇다면 비도는 날아다니는 칼인가 숨겨진 칼인가 소리내는 칼인가? <연인>의 소리는 영화의 색감이나 미장센이 그러하듯 일종의 있을 수 없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아마도 세트나 의상이 판타지적이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있어도 <연인>처럼 소리마저도 판타지적이다 말할 수 있는 무협도 드물 것이다. <연인>의 소리는 장쯔이의 관점에 따라 중심화되어 있다. 똑같이 눈먼 무사가 나오지만 <자토이치>에서는 여러 가지 서민들의 에피소드가 나열되면서 땅을 파는 농사꾼들의 곡괭이 장단이 리듬이 되는 흥겨움과 주변부에 대한 소박한 서정이 있다. 그러나 눈먼 기녀 장쯔이가 소개되는 그 순간부터, 이 영화는 온통 머리의 쇠장식이 찰랑거리는 소리, 구슬로 된 발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의 클로즈업으로 관객의 귀를 간질인다. 유덕화의 검이 장쯔이의 피부를 훑을 때, 바스락거리는 그 소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청각적 애무가 되고 감각의 제국으로 시각과 청각이 하나된 황홀경으로 관객을 유혹한다. 그것은 뛰어난 이미지의 협공술이지만, 그외에는 남는 것이 없는 이미지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연인>의 마지막 대결이 흩날리는 낙엽에서 쏟아지는 눈발로 바뀌어야 하는 까닭도 이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 이미 흰 바탕 위에 뿌려진 핏방울처럼 눈밭에 흘린 피라는 더욱더 강렬한 오감으로 관객을 이끌고 싶었던 것일 게다. <연인>은 그러한 면에서 <붉은 수수밭>의 색감 이후 색과 소리라는 이미지의 성애학에 대한 장이모의 극점에 놓여 있는 영화이다.
세계화에 대한 환상, 장이모의 상업주의 사기극
<연인>에서는 사랑을 하게 되면 모두가 눈이 먼다. <연인>의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다. 장쯔이만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나중에 유덕화도 금성무도 모두가 눈을 가린 채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에게 맡긴다. 유난히 추적장면이 많은 이 영화에서 금성무와 장쯔이와 유덕화는 허무한 무지개 같은 서로의 사랑을 추적하며 메아리 게임을 벌이는 것 같다. 그들은 관군들에게 쫓기지만, 정작 마지막엔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장이모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연인>이 서구화되어가는 중국을 반영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결국 사랑을 택한 장쯔이와 금성무는 모두 죽고, 남는 것은 연인의 변심을 괴로워하며 끝까지 심중을 지켜온 유덕화뿐이라는 거다. 여전히 입맛 쓴 전체주의란 이데올로기를 사수하며 관군과 반군이 맞붙는 스펙터클을 피해나간 장이모의 의중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장이모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최악은 <상하이 트라이어드>이었다. 역시 이미지 위주의 영화였고, 장르영화였으며,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독의 단 하나의 의도는 나이트클럽 가수로 나오는 공리를 치장하기 위한 장이모의 필사적인 노력뿐이었다(그런데도 공리는 장이모를 떠나갔다). <연인> 역시 그러하다. 나는 장이모가 장쯔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개인적인 혐의를 도저히 떨쳐내기 힘들다. 심지어 <영웅>에서 비교적 조역에 불과했던 그녀를 주연으로 다시 한번 멋들어지게 세상에 자랑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공상마저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체 왜 그녀를 세번씩이나 상의가 벗겨져 어깨가 드러나는 그 아슬아슬한 관능의 세계로 밀어넣는지 그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장쯔이를 남장을 시킨 것만 해도 그렇다. 홍콩 무협영화나 60년대 홍콩 장르영화의 전통에서 여성이 남장을 한 채 무공을 뽐내는 설정은 매우 빈번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동사서독>이나 <동방불패>를 보자. 이때의 남장은 보통 상대 남성을 속이기 위한 정체성의 교란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연인>에서의 남장은 장쯔이에게 기녀 복장을 입히는 것처럼 좀더 장쯔이를 아름답게 만들게 하기 위한 페티시에 불과하다. 금성무의 눈으로 바라보는 남장한 장쯔이는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금성무는 ‘이제 모든 기녀들에게도 남장을 시켜야겠다’며 넋을 놓는다. <연인>의 사랑은 이미지의 관능성과 직결되어 있고, 동시에 그것은 장쯔이라는 비너스의 관능성과 직결되어 있다. 장이모는 자신의 최악의 영화 두편에서 모두 오버했다. 여주인공의 치장을 위해 색과 이미지를 낭비하는 장이모는 분명 무엇엔가 단단히 눈이 멀어 있다.
왕가위가 <동사서독>을 만들었을 때 그는 이제 무협은 끝이 났다고 선언했다. 그 죽은 무협의 차디찬 시체에 손을 대고 리안은 좀더 장중하게 사라진 강호의 부활을 염원한다. 이제 장이모의 손에서 중국의 무협은 최악의 의도 속에서 허덕인다. 모뉴멘트밸리 대신 고비사막에서 새로운 중국의 신화를 쓰고 싶어하는 장이모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탈역사화된 그곳에서 지금 피어나는 것은 화려한 중국식 도자기의 치장을 한 공갈빵의 예술이다. 제발 중국이여. 장이모의 도저한 형식주의의 귀환이란 월계관은 치워다오. 진정 참된 무협은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관객을 돈다발로 환산하는 상업주의와 중국 인민을 기만하는 세계화에 대한 환상과 장이모의 개인적 야심이 어우러진 사기극의 극치. 이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의 결과물이 바로 <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