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알모도바르, 리얼리즘 영화를 찍다, <나쁜 교육>
2004-10-06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남자들만 나오는 멜로드라마 <나쁜 교육>

(경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반전을 미리 알고 싶지 않으신 분은 영화를 본 뒤에 읽으십시오.)

<나쁜 교육>은 알모도바르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남자들만이 나오는 멜로드라마이다. 여자배우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대신 여장남자, 여성으로 성전환한 남자, 그리고 (위험하게도) 소년들이 여자들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 영화처럼 남자들이 멜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작품으로는 1987년에 발표된 <욕망의 법칙>이 있다.

동성애 감독들 작품에서 종종 발견되는 것인데, 보통의 영화들과는 달리 <나쁜 교육>에선 여성이 아니라 남자배우들이 욕망의 대상으로 제시된다. 카메라는 남자들의 ‘아름다운’ 몸매를 마치 여성 섹스심벌의 육체를 탐닉하듯 세세히 찍는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파스빈더가 아랍 남자를 바라보는 방식과 비슷하게, 알모도바르는 네 가지 역할을 소화해내는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26)이란 배우를 흥분을 넘어,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퀴어시네마,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남성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라도 알모도바르 영화는 여전히 일반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 같다. 요즘 조금 변하긴 했지만, 아직도 로라 멀비 같은 학자들이 말했듯 남자관객뿐 아니라 여성관객까지도 보통은 여성의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로부터 우리는 그렇게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남자배우의 몸을, 특히 은밀한 부분을 클로즈업으로 바라보는 데 여전히 불편함을, 경우에 따라서는 역겨움마저 느낀다.

그런데 알모도바르 영화는 그 길들임을 깬다. 욕망의 대상은 대개 남자로 제시된다. 감독 자신처럼 영화감독으로 나오는 엔리케라는 청년의 시선을 이용해 알모도바르는 베르날의 엉덩이, 성기 주위, 입술, 눈길 등을 혼이 빠진 사람처럼 클로즈업으로 바라본다. 베르날은 우리에게 <아모레스 페로스>(2000), <이 투 마마>(2001) 등으로 알려져 있는 젊은 배우인데, 이 영화에선 후안이라는 본래의 정체성 이외에 다른 세 가지 역할까지 소화해내는 발군의 기량을 보여준다. 그는 여장남자이자 카바레 배우인 차하라, 자신의 형인 이그나시오라고 정체성을 속인 배우지망생 앙겔, 영화 속 영화인 ‘방문’의 주인공 차하라, 그리고 본인 자신인 후안까지 네 역할을 맡았다.

<나쁜 교육>도 이야기 구조에서 보자면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때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연기하는 배우들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갔던 알모도바르가 이번에는 극중 영화 <방문>을 이용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알모도바르 영화의 클리셰(상투적으로 반복되는 것)이기도 한 역할 바꾸기가 연속해서 등장해 관객은 인물들의 정확한 정체성을 찾기조차 쉽지 않다.

베르날이 맡은 앙겔이라는 청년이 1980년 영화감독 엔리케를 ‘방문’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앙겔은 자신이 엔리케와 종교기숙학교 친구였던 이그나시오라고 소개한다. 지금은 배우로 일하고 있는데 예명이 앙겔이라는 것이다. 엔리케는 이그나시오를 잊을 수 없다. 그들은 소년 시절 친구 이상의 관계에 있었다. 두 청년은 아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앙겔이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엔리케의 옆에는 머리를 면도로 밀어버린 제작감독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감독의 어릴 때 친구라는 앙겔의 방문이 영 반갑지 않다. 감독이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면 할수록 그는 시무룩해진다. 알모도바르식 유머이기도 한데, 대머리의 제작감독은 앙겔과 마지못해 악수를 하며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로 “반가워”라고 말한다. 두 친구의 만남을 질투하는 제작감독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엔리케와 이 남자가 동성애적 관계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 남자가 나오는 첫 시퀀스에서 <나쁜 교육>은 이른바 퀴어 시네마(queer cinema)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엔리케가 일하는 사무실의 실내장식은 동성애적 코드를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마치 파스빈더의 <퀘렐>(Querelle, 1982)에서 잔 모로가 운영했던 동성애 클럽처럼 엔리케의 사무실도 오렌지색과 노란색 위주로 장식돼 있다. 게다가 빨강색 가죽의자, 빨강색 블라인드, 엔리케의 분홍빛이 도는 보라색 셔츠 등 ‘보통’의 색깔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색깔들이 엔리케의 성적 정체성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사실 이런 색깔들은 알모도바르 특유의 색깔이기도 하다.

종교기관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리는 영화

영화 개봉 전부터 말이 많았던 신부의 아동학대 부분이 플래시백 장면에서 암시된다. 마놀로 신부는 아름다운 소년 이그나시오가 <문 리버>를 부를 때 기타반주를 하고 있고, 노래가 끝날 무렵 이그나시오가 “노”라고 외치며 신부로부터 도망가다가 땅바닥에 넘어진다. 피가 흐르는 이그나시오의 얼굴장면이 마치 종이가 찢어지듯 두쪽으로 찢어진다. 아마 ‘나쁜 교육’을 받은 그의 운명도 이렇게 찢어지리라.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세 번째 장편인 <어두운 습관>(Dark Habits, 1983)으로 이미 종교기관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린 적이 있다. 수녀원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그 영화의 수녀들은 모두 레즈비언이며, 약물중독자들이고 또 어떤 수녀는 포르노소설 작가이기도 하다. 주요 인물들이 여성들이고 또 종교기관이 멜로의 배경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두운 습관>은 <나쁜 교육>의 여성판인 셈이다.

<나쁜 교육>의 신부들도 그런 수녀들 못지않게 비정상적인 인물들이다. 소년들을 추행하고, 교육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구타하며 또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다. 알모도바르가 무엇보다도 나쁜 짓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아동학대 같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문 리버>와 <돌아오라 소렌토>를 부르던 이그나시오가 훗날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뒤 약물에 찌들어 사는 타락한 인물로 제시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상 드라마의 주인공인 이그나시오는, 보통의 드라마들처럼 다시 과거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불행하게도 살해되고 만다.

‘나쁜 신부’ 마놀로와 엔리케는 이그나시오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에 놓인다. 엔리케와 이그나시오는 어릴 때 이미 ‘다른’ 성적 정체성을 가질 것이라는 암시가 극장에서의 자위장면으로 제시돼 있다. 어떤 멜로드라마를 보며 두 소년은 여성주인공의 아름다운 얼굴에 반해 서로 상대방에게 자위를 해준다. 자위장면으로 인물의 정체성 혹은 극의 진행을 암시하는 장치는 알모도바르가 종종 써먹는 수법인데, 이를테면 <마타도로>(Matador, 1986)에서는 투우사가 살해된 여성들의 모습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으로 죽음에 대한 그의 집착을 암시했다. <나쁜 교육>의 두 소년이 상대방의 성기를 만지는 장면을 보며, 장차 이들이 동성애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가 밝혀지면 또 다른 사실이 드러나는 구조

만약 ‘방문’이 영화화되면 주인공은 여장남성인 차하라가 될 텐데, 앙겔은 그 역을 요구하고 엔리케는 그의 몸집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어렵다고 대답한다. 엔리케는 이그나시오라고 주장하는 앙겔을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앙겔이 어릴 때 자신들의 칸초네였던 ‘쿠오레 마토’(Cuore matto: 미친 마음)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엔리케 집의 수영장. 그는 앙겔의 몸을 관음하듯 바라본다. 엔리케의 시선에 잡힌 앙겔의 벗은 가슴, 엉덩이 등이 마치 스트리퍼의 몸처럼 비친다. 엔리케는 옛사랑을 되돌리려고 하는데, 앙겔은 그의 뜨거운 눈길을 조심하는 태도다. 엔리케는 거절당한 사람의 상심한 감정을 정리하고 있고, 앙겔은 ‘미친 마음’을 받아들이기 힘든지 푸른 물속에서 눈을 뜬 채 혼자 서 있다.

흔히 서양에서 ‘차이니스 박스’라고 부르는 구조로 영화는 엔리케의 조사를 통해 앙겔의 정체성 밝히기를 시작한다. 하나가 밝혀지면 또 다른 사실이 드러나는 식이다. 먼저 앙겔은 엔리케의 친구 이그나시오가 아니라, 그의 동생 후안임이 밝혀진다. 엔리케의 어릴 적 연인인 이그나시오는 여성으로 성전환한 뒤 약물에 절어 살다가 죽은 것으로 드러난다. 앙겔이 들고온 ‘방문’이라는 시나리오는 이그나시오가 죽기 전, 마놀로 신부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기 위해 써놓은 것이다. 아름다운 소년 이그나시오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가족들의 돈을 훔치고 또 협박편지나 써대는 타락한 이그나시오만 있었던 것이다.

마놀로 신부는 파계한 뒤 베렝게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고, 이그나시오의 협박을 무마하려고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동생 후안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 후안은 학비를 대주는 베렝게에게 간단히 몸을 허락하는 역시 ‘타락한’ 청년이다. 두 남자는 자신들의 관계에 방해되는 이그나시오에게 강한 헤로인을 선물하여 살해한다. 후안은 일종의 남성 팜므파탈이고, 종교학교 교장이었던 베렝게는 이제 살인자로 추락했다. 시나리오를 발견한 후안은 자신을 이그나시오라고 속이고 영화감독인 된 엔리케를 찾아갔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상반되는 남성세계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 나오는 여성들이 고통을 나누며 관용을 베풀고 서로 사랑하는 것과는 달리, <나쁜 교육>의 남자들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고통을 주고, 파괴하고, 살해한다. 섹스만 하지 사랑은 없다. 앙겔과 드디어 성적 관계를 맺은 뒤 엔리케는 말한다. “그는 나와 이제 여러 번 관계를 맺었지만, 단지 육체적으로만 그랬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통해 알모도바르는 여성들의 세상이 얼마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단결돼 있는지를 동화처럼 보여줬다. 넉넉한 아량이 넘쳐나는 여성의 세계에 들어가면 신비롭게도 모든 잘못이 용서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판타지의 세상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이 알모도바르식 세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성세계를 다룬 <나쁜 교육>에서는 판타지를 배제하고 사실주의적으로 영화를 찍었다. 사랑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제시된다. 모두 이기적으로 사랑을 이용한다. 그래서 참 어두운 이 영화는 아주 절절하다. <나쁜 교육>은 리얼리즘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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