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도마 안중근>과 세 가지 점에서 닮았다. 첫째, 장르가 느와르인 점, 둘째 상투성을 자신의 스타일로 삼는다는 점, 셋째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를 방패로 삼지만 결국 두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폭로하고야 만다는 점이다. 두 영화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른데, 이는 순전히 ‘이름의 효과’로 추정된다. 후자에 대한 악의적 평가가 감독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으며, 전자에 대해 ‘그래도 감동’ 운운하는 것은, 제목이 <가족>이고 명절도 다가오니, 영화의 내용과 무관하게 각자 자기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 가지 공통점-가족/민족주의를 뒤집어쓴 상투적인 느와르
<가족>에 무심한 듯 삽입된 장면에, “날씨 추워지면 생태찌개 만한 것도 없죠”라는 아버지의 대사가 나온다. 실로 ‘결정적인 대사’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찬바람이 불고 경기가 어려울 때 땡기는 매운탕 같은 영화다. 얼큰해야 하므로 가벼운 웃음은 절대 금물이고, 정서는 한없이 음울해야한다. 음울이라...신파 멜로도 있겠지만 느와르가 좋겠는걸. 폭력과 액션도 가미할 수 있고, 무엇보다 한동안 느와르가 없지 않았나? 조폭이 비장미를 잃고 희화화되어 민간인 수준에서 놀고 자빠진 영화들 일색이었으니, 대국민 친화사업도 좋다지만 ‘후까시’ 사수궐기대회라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런데 조폭의 폭력을 미화하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테니, 느와르로 가되 주인공을 깡패가 아닌 착한 쪽으로 설정해야하고, 찐한 폭력에도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되렷다...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가족을 사수하기 위해 조폭과 싸우는 아버지와 민족을 사수하기 위해 일제와 싸우는 열사의 진지한 희생-무용담이다.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는 여론의 빗발을 피하기 위한 판초우의로 착용된다. ‘기스’가 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 두 이데올로기는 막강 대의(大義)이지 않은가? 덧씌워진 판초는 해리포터의 망또처럼 안의 것을 안보이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이를 통해 내부의 허다한 단맥상이 부정(父情)으로 애국으로 커버(!)된다.
두 영화는 치명적인 문제를 지닌다. 첫째, 주인공에 대한 이해가 부재하고, 둘째, 극단적 클리세들이 대담무쌍하게 차용되고, 셋째, 갈등 해소가 느닷없다. <가족>의 딸은 24세에 절도전과 3범에 폭력전과가 1범이다. 마지막은 남이 했다 쳐도 그 정도면 상당한 경력이다. 조직의 돈을 훔쳐 숨겨둘 배짱에, 중간보스랑 말 트고 지내는 인맥에, 어쨌든 청부가 가능한 칼 쓸 줄 아는 인물이라면, 이는 그저 그런 불량소녀가 아니다. 영화에서 별로 재현된 적도 없는 지하세계 대모(代母)감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전도연보다 깡다구가 세야 하며, <범죄의 재구성>의 염정아보다 눈치가 빠삭해야 될 것 같은데, 그녀는 너무 평범해 보이며 민간인 마냥 미장원 개업이나 운운하고 있으니, 그녀의 폭력세계와의 깊숙한 연관성은 단지 조폭을 끌어들여 가족과 대립시키고자 고안된 장치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도마 안중근>의 안중근 역시 민족지사라기보다는 열혈 청년에 가깝게 묘사되어있는데, 이는 명백한 사실왜곡일 뿐만 아니라, 자막을 통해서까지 설명하고자 했던 영화의 주제와도 배치된다.
둘째, 두 영화의 클리세 남발은 상상을 초월한다. 백혈병이라....듣기만 해도 “정/말/ 식상한데요~” 거기에 딸이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유 또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이고, 조폭은 꼭 애를 납치하겠다고 협박하고, 아버지는 굳이 조폭 앞에 무릎까지 꿇는 극단적 상황을 연출한다. <도마 안중근>의 어머니에 대한 묘사는 또 어떠하며, 이토오 히로부미에 대한 묘사는 어떠한가? 안중근은 이토오에 대한 개인적 원한 때문이 아니라 국가간의 엄숙한 전쟁이었음을 말하지만, 카메라는 이토오를 악당이자 호색한으로 잡는다. 모든 것이 너무나 상투적이고 극단적이라 영화 전체가 “일명 내시경 개그”의 연속이다.
셋째, 단순한 대립 구도일 망정 갈등해소과정에 개연성이 있다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었을 텐데 갈등해소 역시 우격다짐이다. <가족>의 부녀는 짧게 잡아도 6년의 골이 있었지만 그들의 갈등은 몇 주만에 기필코 해소된다. 이를 위해 백혈병에 조폭의 협박이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동원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해 왔던 것(“내가 누구 때문인데?”)에서, 아버지의 인생이 나로 인해 망쳐졌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해서 그간의 아버지의 모든 악습, 가령 어머니를 구타했던 것(“때린 것 미안하다” “엄마인줄 알았나보지”)이나 폭음(“눈 때문이었다 하지마, 술 때문이지”) 등이 모조리 용서된다. <도마 안중근>에서 일본 검사가 안중근에게 감화되는 과정은 진짜 부지불식간(?)이다. 카메라는 이토오에게 ‘적장에 대한 예우’를 갖추지 않으면서, 일본 검사가 안중근에 대해 ‘적장에 대한 존경심’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냥 부과한다.
파생되는 의미들-가족주의의 난망함과 민족주의의 민망함
이들 영화는 단순히 못 만든 영화로 머물지 않고, 특별한 의미들을 산출한다. <가족>의 부녀는 엄청난 재난과 부채감의 교환을 통해서 비로소 화해한다. 이 상황은 결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길 기대하는 가족화해의 상황이 아니다. 단편 <미친 김치>나 <자전거 경주>, 장편 <인어공주>에서와 같은 화해를 향한 건강한 내부동력이 없다. (골수도 안 맞는다.) <가족>은 가족의 화해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밖에 화해할 수 없는 부녀를 통해, 역설적으로 가족화해의 불가능성과 난망함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딸은 ‘아버지가 내 인생을 망친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 인생을 망쳤고, 내가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엄청난 (원)죄의식과 부채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이 막중한 부채감이야말로 이 영화가 제시하는 부모자식관계의 본질이자 참을 수 없는 가족주의의 무거움이다. 부모가 내 인생을 망친 것도 아니고 내가 부모 인생을 망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부모로부터 가뿐해지고 싶은 우리들에게 이 영화는 엄청난 족쇄를 들이댄다. 진짜 느와르다.
한편 <도마 안중근>의 우스꽝스러움은 민족주의라는 진중한(?) 정치이념이 기실 천박한 대중추수주의적 정서나 노골적인 상업주의와 얼마나 잘 내통되는지를 실존적으로 증명한다. 80년대까지 문학에서 ‘민족주의’는 ‘순수(문학)주의’에 반대하는 ‘참여주의’와 비슷한 맥락의 말이었고, ‘상업주의’와는 전혀 괘를 달리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같은, 민족주의와 상업주의가 존재론적으로 결합된 소설은 민족주의를 둘러싼 담론의 지형을 바꾸었다. 영화에서도 <장군의 아들>(1990) 이래 민족주의 정서를 표방하며 상업적인 성공을 꾀한 예들은 많으며, 최근작 <바람의 파이터> 역시 같은 전략을 통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흥행의 성공이 영화의 성공으로 오인되는 통에 민족주의와 상업주의의 결합이 본격적으로 반성되지 못했다. 그런데 <도마 안중근>은 두 이데올로기간의 적나라한 계간(鷄姦)을 화끈하게 노출시킴으로써 둔감한 사람들조차 민족주의를 외화(外化)시켜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 영화의 콘텍스트적 의의는 참으로 긍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