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1등을 꿈꾸는 어른들에게, <천국의 아이들>
2001-06-20

드라마를 끝내고 요즘 읽은 만화에서 1등만 꿈꾸는 아저씨가 있었다. 줄을 설 때도 번호표를 받을 때도 동네축구를 할 때도 배번이 1이어야 하는, 숫자 1에 집착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물론 그 만화는 아이들을 위한 만화여서 아이들이 주인공이었고, 그 아저씬 한 단편의 게스트였다. 주인공 아이들은 이 아저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저씨를 갖은 방법으로 골려준다. 어른들의 이야기만 드라마로 만들다가 그 만화를 보고 아이들의 이야기가 보고 싶어졌다. 몇년 전에 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봤을 때의 감동이 기억나기도 해서 마라톤을 하는 아이의 영화라는 정보만으로 영화를 골랐다. 물론 주위에서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도 한몫 했다. 1등만을 위해 살아가는 어른들이 봤을 때 3등을 꼭 해야 하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영화 내내 지우지 못하였다.

주인공 알리가 3등을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일상적인 어처구니없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신발을 고치는 손이 화면의 처음부터 영화에 대한 인내를 요구하듯 길게 이어진다. 물론 계속되는 소음으로 그곳이 시장의 한모퉁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그 정보가 끝난 뒤에도 신발을 고치는 손은 계속된다.

이제서야 관객은 그 낡은 어린이 구두를 얼마나 꼼꼼히 정성들여 고치고 있는지, 이 신발이 감독과 어린 주인공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 미리미리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지루한 이들은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거기에 아직도 계속되는 신발과 손의 화면에서 감독의 자존심 아니면 대단한 자신감까지 느꼈다면 너무 큰 비약이었을까.

그런데 너무나 어이없게 그 소중한 신발(실은 주인공 알리의 동생 자라의 신발)을 야채 가게에서 잃어버린다. 그리고 두 아이의 신발에 관한 이야기들이 알리와 자라의 눈으로 비쳐진다.

두 아이에게 그 낡은 신발은 아주 필요했다. 당장 내일 학교에 신고 갈 신발이 없는 동생 자라와 가난한 집에서 차마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부모에게 말하지 못하는 알리가 공책에 서로의 이야기를 써서 주고받는 장면은 이 영화가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암시해준다. 그 방안 구조에서 이 집의 가난함과 엄마의 병, 아버지가 다니는 허름한 직장, 부업들이 보여진다. 부모의 모습은 잠깐 비쳐졌다가 들리는 그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어른들의 모습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아이들은 조그맣게 소리내어 글을 쓰면서 당장 내일의 걱정, 집에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걱정의 이야기를 한다. 오전엔 동생이 신고 학교에 가고 오후는 알리가 받아서 신고 등교하자고 이야기하고 몽당연필을 쓰고 있는 동생에게 긴 연필 한 자루를 내밀었다. 동생 자라에겐 큰 유혹이었다.

이제부터 두 아이에게 신발은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다음날부터 알리와 자라에게 신발에 얽힌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헐렁한 신발을 신고 등교하는 자라, 체육시간, 하굣길에 오빠에게 신발을 주기 위해 뛰어오는 자라, 골목 한모퉁이에서 기다리다 그 신발을 신고 뛰어가는 알리, 지각하는 알리, 신발 때문에 친구들과 축구도 하지 못하는 알리, 이 영화는 이 두 아이들의 시선과 신발에 모든 에피소드들이 모아져 있다. 그러다가 잃어버린 신발을 신고 있는 아이를 만나게 되고 알리와 자라는 그 아이 집에 따라가보지만 막상 그 아이의 아버지는 소경에, 어쩌면 자기보다도 더 가난한 아이라고 생각해 그냥 돌아선다. 그리고 맞은 마라톤대회 공고. 거기의 상품 중 눈에 띈 것이 3등에게 준다는 운동화 한 켤레.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도, 아버지와 정원을 돌봐주는 부업을 같이 다녀도 동생 자라의 신발이 머릿속에 가득해 있던 알리에겐 그것이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알리의 눈에 비친 운동화 한 켤레를 화면 가득히 잡아 신발이 이 아이들에게는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면서 동생 앞에서 웃어보이는 표정을 잡아낸다.

3등이 되어 의기양양하게 운동화를 들고 돌아갈 거라는 추측을 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3등이 아니라 1등이 되어버린 알리를 보여주어, 관객의 허탈함을 유도하고 다시 ‘신발은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또다시 하게 한다. 벌써 관객은 알리와 동일인이 되어 있었다. 감독과 배우의 탁월한 능력이라고밖에는 할말이 없다. 1등이 된 알리에게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지만 알리는 눈물을 흘리고 집으로 돌아와 실망하는 동생을 본다. 낡은 운동화를 벗어던지면 다시 감독은 이제 밑창까지 떨어진 운동화를 보여준다. 더이상 신을 수 없는 운동화와 물집이 심하게 잡힌 발을 보여주고 그 발을 물에 담그면 금붕어들이 와서 위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알리의 아버지가 두 아이의 신발을 사오는 것을 관객이 알든 모르든, 클로즈업이 아닌 일상적인 화면에서 보일 듯 말 듯 휙 지나가게 해버려 이 영화에서 신발은 더이상 중요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감독 마지드 미지디는 아이들의 일상사를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과연 이 영화가 아이들의 순수함을 표현하려 했을까. 아니면 모든 어른들에게 아이적의 지나간 향수를 불러일으키려 했을까. 아이들이 만약 이 영화를 본다면 ‘그래 당연하지, 오빠라면 그렇게 해야지’라고 하면서 오히려 감동이 덜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영화에 지나치게 감동하는 어른들을 의아한 눈으로 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감독은 오히려 어른들에게 뭔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주목한 것이 오히려 이 두 아이를 감싸고 있는 어른들이었다. 알리가 만점을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담임 선생님, 마라톤대회에서 학교를 빛냈으면 하는 체육 선생님, 3등이 되고 싶어한 주인공이 1등이 되었을 때 몰려와서 사진을 찍던 어른들.

그 어른들은 드러내놓고 1등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항상 1등이 되고 싶은 어른들 아니었을까. 감독의 의도가 가난함 속의 희망을 표현하려 했든, 두 아이의 에피소드로 잔잔한 감동을 주려 했든 아이들을 통해 어른들이 느끼라고 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근데 천국에서도 1등과 3등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도 1등을 하려고 기를 쓰고 살아야만 할까. 만약 두 주인공 알리와 자라가 천국의 아이들이 아니라 천국에서 온 아이들이라면, 천국은 1, 2등이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면?

표민수/ KBS 드라마국 PD <거짓말> <바보같은 사랑> <푸른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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