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FM 청년, 강력계 형사로 거듭나다, <썸>의 고수
2004-10-14
글 : 정진환
사진 : 박은영

수요일 오후, 컴퓨터 자판 소리만 타닥대는 편집실. 가끔 울리는 전화 벨소리와 ‘아무개씨’ 하는 퀵서비스 아저씨의 호출만이 정적을 깨는 긴장된 마감 시국. 고수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맞으러 가려는데, 그가 저벅저벅 사무실로 걸어들어와, “안녕하세요” 하고 큰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인터뷰하러 오는 배우들이 편집실에 들르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저마다 마감 삼매경에 빠져 있던 기자들은 이 비현실적인 풍경에 화들짝 놀란다.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네는 여기자들의 얼굴에 홍조가 번지는 사이, 그가 다시 “수고하세요” 하면서 발길을 돌린다. 따라나가는 기자는 뒤통수에 따가운 질투의 화살이 꽂히는 걸 느낀다.

고수는 요즘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 촬영과 <썸>의 홍보 일정으로 정신없이 바쁘다. 그런데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얼굴 때문인지 별로 고단해 보이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묶여 있어야 하는 드라마 촬영 막간에 달려온 그는 연신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시계를 보니 20분 정도 지났다. 이런 만남에선 별로 늦은 축에도 안 든다. 인터뷰를 시작하려 자리에 앉으니, 잔에 음료수를 따라준다. 조금 당황스럽다. “예의바른 청년”이라는 얘긴 익히 들었지만, 이건 매너가 좋은 것과는 다른 느낌,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의 자세다. 영화 홍보차 출연한 오락 프로 얘기를 꺼냈더니, 고개가 툭 하고 떨어진다. “말할 타이밍을 계속 놓쳐서, 땀만 흘리다 왔어요. 오늘은 인터뷰니까, 말 많이 하기로 작정하고 왔어요. 안 그럼, 다들 너무 힘들어하시니까.” 충청도 논산 총각답게 느릿느릿한 말투로 조곤조곤 이어지는 답변. 그 덕에 받아 적기가 좋다.

고수, 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건 여자친구의 통금 시간에 맞춰 늦은 밤 골목길을 달리던 박카스 광고 속의 모습. 그런 착실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년의 이미지가 <엄마야 누나야> <피아노> <순수의 시대> 등의 드라마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아마도 지루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장윤현 감독이 <썸>에 합류하길 권했을 때 그는 시나리오도 안 보고 하겠다고 나섰다. 100억원의 마약 실종 사건을 추적하던 형사가 언젠가 겪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어떤 하루 동안 끊임없이 미궁에 빠져든다는 이야기. ‘리틀 오대수’라 부를 만한 사자머리에 피어싱을 한 ‘로커’ 같은 외양도 그렇거니와 피로와 혼란과 의문에 찬 강력계 형사의 용광로 같은 내면을 상상해봐도, 고수는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카드다. “대놓고 여쭤보진 못했는데, 저한테서 새로운 가능성을 봐주신 것 같아요.”

고수의 영화 데뷔 스토리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5년 넘게 기다린 첫 영화, 찍는 동안 계절을 세번 보냈고, 개봉을 앞두고 계절이 한번 더 가고 있다. 그런데도 ‘조금 더’를 외치는 이 남자의 느긋함이란. “더 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죠. 후시녹음하러 가서, 감독님한테 다시 찍자고 졸랐다니까요. 궁금해요. 최민식 선생님이나 설경구 선생님 같은 분들도 작품 끝내고 나면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그러실까요?” 왜 아니겠나. 첫 영화의 시사를 앞두고 “못 볼 것 같다”며 잔뜩 긴장해 있는 고수가 앞으로 바라는 건 이것뿐이다. “연기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고수가 말하는 고수에 대한 5가지

첫 영화 <썸>

“영화에 대한 동경은 계속 있었어요. 코미디는 어렵고, 자신도 없고요, 멜로는 많이 했고, 다른 걸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제안이 들어왔어요. 장르도 미스터리고, 소재도 독특하고, 장윤현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결정했어요. 워낙 오랜만에 하시는 작품이고, 전작에서 대배우들(한석규, 전도연, 심은하)이랑 작업하셨던 것도 부담됐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웃음) 열심히 해야죠. 첫 작품인데 너무 고생 많았다, 다들 그러시는데, 전 이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영화는 다 7개월 걸려 찍고, 100신 넘고 그런 줄 알았어요. 재밌게, 여유롭게 찍었고요, 지금은 좀 걱정이에요. 첫 경험이 너무 좋아서, 다음 작업 때 생각나고 비교되고 할까봐.”

강성주 되기

“사건 해결 전 하루의 상황이거든요. 호흡이 빨라서 감정을 넣기가 힘들었어요. 지쳐 있고 예민해져 있는 상태로, 많은 일을 겪게 되잖아요. 그래서 현장에서도 안 웃고, 말도 거의 안 했어요. 하지만 한발 물러선 듯한 느낌으로 임하는 게 맞다고 생각됐어요. 보는 분들이 숨막혀 하시면 안 되니까요. 7개월을 하루처럼 살아야 하는데, 먹는 거 좋아해서 잘 붓고 찌거든요. 그거 조절하고 관리하느라 애 좀 썼죠.”

연기, 일상

“제가 걱정을 혼자 짊어지는 편이에요. 오죽하면 감독님이 영화 너 혼자 만드는 거 아니다, 여럿이 같이 만드는 거다, 그러셨겠어요. 그러니까 더 걱정되더라고요. 민폐될까봐. 농담이고요. 그래서 안 즐기는 것처럼 보이나봐요. 난 즐기는 거거든요.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제가 원래 하나에 빠지면 다른 걸 못해요. 그것만 생각하거든요. 촬영장 밖에서도 그 역할로 살아보려고도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카메라 앞에서나 제가 그 역할이지,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아닌 거니까요.”

바른 생활

“아닐걸요. (웃음) 그건 제 여러 가지 이미지 중 하나예요. 저도 화낼 때 있고, 법 어길 때 있어요. (교통신호 위반 얘기다) 한참 그 이미지로 띄워질 때는 길에 침도 못 뱉었어요. (웃음) 제 일상에 제약이 많아지더라고요. 원래도 좀 무난한 편이죠.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 많이 들어요. 이러면 안 된다, 예의에 어긋나는 거다, 이런 생각이 들면, 못하겠더라고요. 남한테 부탁하거나 폐 끼치는 것보다 귀찮아도 직접 하는 게 맘이 편해요. 손해 아니냐고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진심을 알아주시던데요.”

이름, 이름값

“본명 맞고요. 수는 ‘물주변 수’자를 써요.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인데요, 예로부터 물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저도 그렇게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지으셨대요. 그래서 그런가, 그동안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감사하죠. 붙여 읽으면 고집스럽게 들리기도 할 텐데, 실제로 제가 좀 고집이 센 편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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