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얼굴없는 미녀>의 지수
2004-10-15
글 : 정이현 (소설가)
억압과 두려움을 글쓰기로 쏟아내는 여자. 아프도록 섬뜩한

소설가의 이미지는 어떤 걸까? 괴팍한 성격, 고립된 생활, 특이한 인상? 그러나 내가 봐온, ‘소설을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들’ 은 대개 평범하고 상식적인 분위기를 가졌다. 어떤 이는 대기업 중견간부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며, 또 어떤 이는 수학을 가르치는 중학교 여교사처럼 보이고, 또 다른 이는 영락없이 동네 슈퍼마켓 주인 아저씨로 착각할만한 외양을 하고 있다.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내부의 정열을 주체못하여 기인(奇人)의 일상을 사는 분들도 물론 계시겠지만, 그분들께서도 텍스트와 작가 사이의 거리(距離)만큼은 칼같이, 어쩌면 더욱 엄격히 유지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작가의 입이 아니라, 화자의 몸으로 말하는 것이 소설인 까닭이다.

<얼굴 없는 미녀>의 지수도 소설을 쓰는 여자다. 일단 상당히 난해한 헤어스타일이 눈에 띈다. 일명 사자머리 파마. 생쥐 한 마리를 막 잡아먹고 온 듯 입술에는 새빨간 립스틱을 발랐고, 가슴을 한껏 강조한 디자인의 원피스 역시 현란한 빨간색이다. 평범한 생활인이 아니라 ‘들려있는’ 예술가의 모습이다. (아쉽게도, 이렇게 패셔너블(?)한 소설가를 현실에서는 한번도 못 봤다.) 현대 정신의학에서 경계선 장애라 명명한 증상을 앓고 있는 그 여자는 숨을 쉬듯 소설을 쓴다. 어디까지가 극중 소설의 서사이며, 어디까지가 최면상태에서 드러난 무의식인지, 혹은 의도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인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당사자 역시 잘 모를 것이다. 지수가 쓰는 소설은 시점이 불명확하고 이미지가 불투명하다. 문장은 어색하고 표현은 모호하다. 그 작품이 신춘문예에 출품되었다면, 대부분의 심사위원은 조용히 원고를 덮었을 것이다.

소설가의 욕망과, 경계선 장애 환자의 욕망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꿈과 억압을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억압의 기원과 공포를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또는 왜곡하고 변형한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변형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미학적으로 변형한다. 그것에 미적 합리성을 부여하고, ‘세계’라는 대상과의 거리를 조정해야 하는 것이 소설가의 임무다. 지수의 글에는, 그 거리감이 부재한다. 심리적 작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미학적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소설창작교실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현대소설이 아닌, 넋두리의 수준에 머문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지수가 쓴 글이 문학의 텍스트가 아니라고 해서, 그가 글을 쓰는 행위 또한 문학이 아닌 것인가? 문학이란 무엇일까. 문학적인 글쓰기는 문학제도 너머에도 있는 것이 아닐까. 제도는 갇혀 있지만, ‘문학적인 것’은 어디에나 있다. 제 안의 두려움과 억압을 쏟아내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택한 여자. 그 핏빛 진심이 너무 섬뜩해서 나는 그 여자가 참 아프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