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팝콘&콜라] ‘행불’ 될뻔한 첫 상영 관객들 박수 있으매
2004-10-15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올 칸영화제에서 왕자웨이 감독의 은 공식 상영 전 날까지 필름 공수가 되지 않아 기자시사회가 취소됐던 ‘안좋은 추억’을 남겼다. 비슷한 일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벌어질 뻔 했다. 문제의 주인공은 신재인 감독의 <신성일의 행방불명>(사진). 상영 첫날(8일) 첫상영(오전 10시)으로 잡혀있던 이 영화의 필름은 전날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후반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의 필름임에도 영화제쪽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초청을 강행했던 중요한 영화 가운데 한편이었다. 그리고 당일 새벽 4시30분에 영화제의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허문영씨에게 날아온 전화 한통. 도저히 상영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수백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와중에 이런 사고가 한 건도 일어나지 않는게 기적이겠지만, 영화제 쪽으로서는 첫날, 첫상영을 취소한다는 건 두고두고 ‘씹힐 거리’를 갖다바치는 꼴이나 다름없다. 허프로그래머는 문제가 있더라도 일단 6시30분 비행기를 탈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놓친 <행방불명>은 간신히 7시30분에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날씨 탓에 비행기가 겨우겨우 이륙한 것이 8시15분. 김해공항 도착시간은 9시가 넘었고, 스태프들은 30분 안에 필름을 극장으로 공수해야 하는 ‘불가능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상영관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55분. 악몽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올해 부산에서 처음 상영하는 디지털 장편 가운데 하나인 이 필름(엄밀히 말하면 테이프다)을 틀기 위해 구한 장비가 말썽을 일으켰다. 전날 확인할 때까지 멀쩡하게 작동했던 램프가 꺼져버린 것. 국내에 3대 밖에 없는 장비라 당장 전구를 갈아끼우는 건 정말로 ‘불가능한 임무’였다. 결국 화면은 누아르 영화처럼 어두운 상태에서 상영됐다. 상영 전에 이 필름의 완성도에 대해 영화제 쪽은 양해를 구했지만 ‘누아르’ 조명은 영화가 시작된 뒤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공지가 되지 않았다. 영화가 워낙 괴이하다는 사전 설명을 들은 탓인지 객석에서는 어두운 조명도 영화의 일부인 것으로 이해돼 영화가 끝난 뒤엔 오히려 박수까지 나왔다.

상영을 마친 뒤 영화제쪽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와 함께 입장료를 환불했다. 박수를 쳤던 관객들도 모두 돈을 돌려받아갔지만 더 이상의 문제는 불거지지 않았고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칸의 처럼 사람들에게 ‘안좋은 추억’을 남기지 않았다. 불가피한 문제를 일방적인 통보로 끝낸 칸영화제와 달리 피말리는 상황을 정면돌파하려고 했던 영화제쪽의 노력과 관객들의 이해가 ‘사고’를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막아낸 셈이다. 9일에는 <아메리칸 데이라이트>가 영화사에서 보낸 필름 착오로 한글자막없이 상영됐지만 이 역시 관객들의 이해 덕에 ‘소동’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외국영화인들이 부산영화제의 관객 수준을 칭찬할 때면 왠지 외교적 수사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는데, 실제로 부산영화제는 한층 성숙해진 관객들의 덕을 크게 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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