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귀신이 산다>;로 본 김상진 코미디의 변화와 발전
2004-10-15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귀신이 산다>는 김상진 감독의 7번째 영화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코미디’이다. 데뷔작인 <돈을 갖고 튀어라>가 95년 작품이니, 10년 가까이 한 우물만 파온 셈이다(두 번째 작품이자 ‘액션버디영화’인 <깡패수업>을 하나의 예외로 볼 수는 있다). 충분히 ‘작가’ 김상진을 이야기할 시점이 된 듯하다. 그는 입버릇처럼 ‘한 우물만 파겠다’고 말해왔다. 분명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코미디는 하나의 장르이기 이전에 자신의 ‘체질’이자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 욕설과 ‘개싸움’이 단골 메뉴처럼 등장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히 ‘조폭영화’ 또는 ‘액션영화’로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잉여를 포함하고 있다. 그가 아무리 ‘호러’와 ‘멜로’를 솜씨있게 혼성했더라도, 그것은 ‘코믹호러-멜로’라기보다는 ‘호러-멜로코미디’로 보인다. 체질 개선에 성공하지 않는 한, 그가 딴 우물을 파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 체질 개선이 쉽지 않아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체질과 스타일은 일정한 흥행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닭살 알레르기’라고 진단할 수 있는 그 체질 또는 스타일은, 이 시대의 ‘세대 감각’ 또는 ‘정치 감각’과 은밀히 소통하고 있다. 그의 체질이나 세상, 그 어느 한쪽이 바뀌지 않는 한, 그는 계속 한 우물을 팔 것이다.

잘 다듬어진 드라마를 지향하는 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주유소 습격사건> 이후로 한정해보더라도), 그의 영화가 늘 ‘변화’를 모색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 변화는 그 ‘사건’ 이후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기보다는 그 직후부터(즉 <신라의 달밤>부터) 급격하게 이루어졌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주유소…>는 김상진의 필모그래피의 ‘2기’를 예고하는 신호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외’이자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드라마’를 염두에 두지 않은, ‘일부러 거칠게 만든’, 유일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달밤> 이후 그의 영화는 ‘잘 다듬어진’ 드라마를 지향(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을 말이 되도록 만들어내기 위해 공들이고 다듬는 노력)해왔고, 그러한 노력이 이제 <귀신이 산다>에서 일정한 정점에 도달한 듯 보인다. 그 영화들이 <주유소…>의 연장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개별 개별의 상황을 처리하는 ‘김상진식 터치’ 탓일 것이다. 그리고 그 터치란 변하지 않는 체질의 다른 이름이다.

<귀신이 산다>는 ‘호러’와 ‘멜로’를 적극적으로, 그리고 솜씨있게 혼성해내고 있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코미디이다. 그리고 아주 잘 만들어진 ‘well-made movie’이기도 하다. ‘김상진’과 ‘잘 만들어진’이라는 수사는,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고, 일종의 형용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잘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주유소…>를 통해서, 비로소 자기 ‘색깔’을 인정받았던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를 잘 만들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은, 칭찬과 격려일 수도 우려와 질책일 수도 있다. 그 판단의 기준은, 진짜 ‘김상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단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귀신이 산다>는 그 ‘김상진다움’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럽게 다시 묻게 만드는 영화이다.

상황 뒤집기가 주는 웃음과 감동

김상진은 일종의 ‘닭살 알레르기’ 환자이다. 그는 늘, 진담은 농담처럼, 농담은 진담처럼 말해야 하는 체질을 지녔다. 그것이 그의 영화 속에 존재하는 많은 ‘아이러니’의 진원지이다. 흔히 ‘상황 코미디’로 일컬어지는 그의 영화들에서, 그 ‘상황’과 그것이 유발하는 웃음의 핵심은 ‘뒤집힌 권력관계’이다. 그것을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은 <주유소…>일 것이다. 네명의 무정부적 괴한들에 의해 점거당한 주유소 안에서 모든 기존의 질서와 권력관계가 뒤집힌다(사장과 직원의 역관계, 학원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관계, 그리고 괴한들의 ‘기름’과 경찰의 ‘총’의 역관계).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 역관계 전복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던 영화인 셈이다. <신라의 달밤>의 드라마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계속해서 반전되는 역관계의 유희였다. 김상진은 그것으로 ‘웃음’도 만들고, 제법 가슴 찡한 ‘멜로적 감동’(한 여자를 빌미 삼아 쌓여가는 두 사나이의 우정의 드라마에서 비롯되는)도 만들었다. <광복절특사>도 죄수들의 탈출과 폭동으로 인한 교도소 내 역관계 전복이 ‘웃음’의 코드가 된다(하지만 이 영화에서 용문신(강성진)에 의해 창출된 ‘해방구’에서 펼쳐지는 기득권층에 대한 조롱은 경박한 해프닝에 가까웠고, 더욱이 그 폭동을 진압하는 사기꾼(설경구)의 ‘말’은 정말 ‘닭살’ 돋는 실착이었다. 그런 점에서 <광복절특사>는 <주유소…> 이후 김상진 영화의 최대 태작이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안이한 선택이었다).

김상진식 상황 뒤집기는 언제나 ‘단순-무식-과격’한 캐릭터의 원한(怨恨) 또는 원망(願望)에서 비롯된다. 그는 언제나 그 캐릭터가 지니는 ‘단순-무식-과격’이 그 원한과 욕망의 징후임을 친절하게 드러내는 버릇이 있다. 그것이 김상진 영화의 ‘플래시백’의 기능이다. 가볍고 경쾌한 농담처럼 던져지는 그 ‘회상’에는, 언제나 과거의 외상에 대한 호소가 있다. 그리고 그 농담에는 이 땅의 다양한 ‘아웃사이더’를 향한 김상진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상진 특유의 체질 탓에, 웃음을 팔기 위해 그 주변성을 이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전복적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웃음을 이용하는 것인지, 늘 헷갈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변화의 조짐- 꼰대들(아버지들)과의 제휴

<귀신이 산다> 역시 그 아웃사이더의 원한과 원망을 그 서사적 동력으로 삼고 있지만, 흥미로운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기도 한다. 박필기(차승원)는 한명의 아웃사이더이지만, 일정하게 ‘제도권’에 자리잡는 데 성공한 아웃사이더(조선소 기사)라는 점에서, 이전의 그들과는 구별된다(대기업 기간노동자와 그들의 작업현장이 한국의 상업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일이 있기는 있었던가?). 그래서일까? 이 영화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배 만드는 것만 30년간 해온 베테랑 노동자’ 작업반장 장길복(장항선)의 존재이다. 그동안 김상진 영화에서 아버지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반항의 대상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은 김상진식 ‘정치성’이 지닌 징후이기도 했다. <주유소…>에서 순수한 형태로 드러났던 그 아버지들은, 이후의 영화들에도 수없이 나타났고 또 희화화되었다. 때론 ‘배지 던지는 것’ 이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경찰의 형상으로, 때론 살기 위해 자신의 죄상을 낱낱이 고백하는 국회의원과 간수들의 형상으로. 그 ‘꼰대들’에 대한 반항 또는 조롱이 김상진의 정치성의 동력이자 한계였다. 그랬던 그가, <귀신이 산다>에서 그 ‘꼰대들’과의 적극적인 제휴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귀신이 산다>에는 주인공 박필기의 두명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에게 ‘내집 마련’의 욕망을 유산으로 남겨준 생부와 그가 그 욕망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원조를 하는 양아버지인 작업반장. 그런데 그들은 단지 ‘영화 안에서’ 주인공 박필기의 조력자일 뿐만 아니라, ‘영화 밖에서’ 감독 김상진의 조력자이기도 하다. <귀신이 산다>가 ‘잘-만들어진’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단지 세련된 테크닉(메인 타이틀의 애니메이션, 엄청난 분량의 CG 동원, 분할편집의 재치있는 사용 등)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히 공들인 ‘드라마투르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면, 호러와 멜로의 그 자연스러운 연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작업반장 장길복이다. 그는 처음부터 호러와 멜로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기 위해 감독을 대신해 ‘복선’을 깔며, 인간 박필기와 귀신 이연화(장서희)의 역관계의 역전을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인물이다. 때로 두 아버지는 감독의 ‘닭살 알레르기’로 인한 자의식을 대신 무마해주기도 한다(두번에 걸쳐 절묘한 타이밍에 결정적 원조자로 동원되는 두 아버지는 “내가 너무 늦었지”라는 농담으로, 그 기막힌 우연의 쑥스러움을 가볍게 무마시킨다).

스스로는 닭살 돋을 일이겠지만, 김상진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감독이다. 김상진이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정치 혐오’는 어쩌면 그의 ‘닭살-콤플렉스’가 낳은 징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의 서사적 원형에는 ‘꼰대들’에 대한 반항이자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애정이라는 ‘정치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는 이야기가 잘 안 풀릴 때마다 노골적으로 ‘정치풍자’처럼 보이는 상황 연출로 그것을 돌파하려는 버릇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정치성’은 그의 영화적 상상력이 지니고 있는 ‘자신도 모르고 있는 성감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귀신이 산다>는, 감독 김상진이 세상과 영화(전반부에 등장하는 수 많은 ‘유령의 집’ 장르에 대한 인용 또는 논평, 후반부에 등장하는 판타지멜로에 대한 가벼운 비틀기)에 대해 참 할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의 체질화된 비틀기 또는 모든 엄숙주의(메이저)에 대한 냉소주의는, 근본적으로는 불안정하고 과도적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냉소주의로 위장된 체념일 수도, 웃음으로 위장된 전복에의 욕망일 수도 있다. <귀신이 산다>가 그 어느 쪽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지 그리고 이후 그의 영화가 어떤 방향을 지향할 것인지는, 좀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진정한 전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세련된 테크닉이라기보다는 그 테크닉을 넘어서는 에너지라는 사실이다. <귀신이 산다>에서 보여준 그의 외공을 지켜보는 것도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주유소…>의 그 무정부적 에너지(내공)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작금의 한국 영화판의 현실은, 자꾸 그 ‘그리움’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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