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화 〈썸〉의 첫 장면은 영화의 절정 부분과 띠처럼 이어져 있다. 치사량의 마약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은 유진(송지효)의 얼굴이 잠자는 유진의 얼굴과 겹친다. 그러니까 잠에서 깨어난 유진이 앞으로 24시간 동안 겪는 일은 그가 이미 어디선가 겪은 일이기도 하다.
〈썸〉은 이 24시간의 이야기를 그린다. 벨 소리에 눈을 뜬 유진은 디지털카메라동호회의 한 회원에게 전달하라는 부탁과 함께 MP3 칩을 받는다. 영문 모를 물건을 가방에 넣은 채 출근길에 나선 순간부터 그는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쫓기고, 자취를 감춘 100억원대 마약의 행방을 찾는 형사 강성주(고수)와 조우한다. “이 남자를 기억해.” 어디서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릿 속에 각인된 강성주와 얽혀갈수록 유진의 눈에는 기억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펼쳐지고 잠입수사를 하던 강성주는 범인으로 오인을 받아 궁지에 몰린다.
유진이 겪는 기시감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고편이다. 동시에 예견된 운명을 주인공들이 어떻게 벗어날까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하는 일종의 미끼다. 극 초반 성주를 언젠가 봤던 것으로 착각했던 유진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지’로 바뀌어 가면서 일면식도 없던 성주와 유진을 하나의 끈으로 묶고, 두 사람은 이미 신의 손을 떠난 운명,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맞서게 된다. 미래를 보지만 도무지 자신이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유진의 공포와 (관객이 보는)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정된 파국에 가속기를 밟는 성주의 질주가 영화의 긴박감을 가파르게 몰아쳐간다.
〈썸〉은 영화 전체를 감싸는 강한 테크노 비트처럼 빠르고 단절적이다. 충분한 사전 설명 없이 짧은 컷으로 편집된 영화 초반의 흐름은 감각적이고 속도감이 넘치지만 흩어진 이야기를 하나로 조합해내기까지는 인내심을 요한다. 영화 전반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는 이 리듬감이 사건을 봉합시키는 결말에 가서 두 사람의 멜로에 치중되며 느슨해지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약간씩 헐거워지는 미스터리 구조를 빈 틈을 메우는 건 충돌의 이미지들이 발산해내는 정서다. 거대한 모니터로 문제의 차량이 이동하는 공간을 하나씩 포착하는 유진의 눈에 잡히는, 느리고 충격적인 죽음과 성주의 차가 가로지르는 서울의 복잡한 도심이 빗 속에서 정지되는 듯한 풍경 등 숨가쁜 영화의 리듬을 순간순간 잡아채며 멈춰서는 장면들이 강렬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22일 개봉.
<썸> 장윤현 감독 인터뷰 “흥행보다 호평 받았으면”3년 전에 엎어진 에스에프 영화 <테슬라>가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 바깥에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다른 세계’에 대한 영화였다. <썸>에서는 이 세계가, 우리의 의식과 현실이 분리되는 순간, 즉 잠을 잘 때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정했고, 보통 사람에게는 망각되는 이 세계 또는 경험을 기억하는 유진의 기시감이 운명과 맞서는 의지로 작동하게 된다.
전작에서부터 남다른 애착을 보여온 자동차 추격씬의 절정을 보여준다.자동차는 도시적 삶을 보여주는 중요한 소품이기 때문에 늘 특별하다. <썸>에서도 자동차는 사건의 동기나 전환점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촬영기간 7개월 가운데 2개월은 자동차 장면만 찍을 만큼 공을 들였다. 어려웠던 건 스케일 큰 사고씬보다 달리는 자동차의 좁은 실내를 다양한 각도로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것이었다.
스릴러에서 출발해 멜로로 사건을 봉합하는 결론이 관습적이라는 느낌도 든다.멜로 감정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유진은 <접속>에서 자신을 열어보여주려는 수현과 <텔 미 썸딩>에서 상대방을 지켜보는 수연이 중첩돼 있는 인물이다. 수현과 수연이 그랬듯 유진은 이런 감정들을 통해 남자를 움직이게 하고 이 과정에 멜로라는 감정은 필연적이다. 다만 <썸>에서는 멜로의 정서를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 마지막 장면에서 둘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만 깔아놓으려고 했다.
<썸>을 통해 제작자에서 감독으로 복귀하는 것인가5년 만에 감독으로 나서니까 초반에는 어색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더라.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영화를 찍으려고 한다. 가능하면 2년에 세편쯤? 그동안 계산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영화만 연출해왔는데 이제는 좀 지겹다. 앞으로는 배우들의 연기가 좀 더 자유로운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