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김수현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2004-10-19
글 : 김진철 (한겨레 기자)

“지금 이 시대에 어떤 드라마를 내놔야 가장 좋을까요? 사람들이 희망 없이 지쳐있고, 거칠어졌어요. 다른 거 다 그만두고 촉촉하고 아름답게 젖어들 수 있는 그런 얘기, 되게 싱거울 수도 있겠지만 시청자 처지에서 재밌는 드라마가 나왔으면 해요.”

김수현씨가 지난 16일 시작한 한국방송 주말극 〈부모님 전 상서〉의 제작발표회장에서 한 말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드라마 작가’, ‘40년 한국 드라마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 ‘언어의 연금술사’ 등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답게, 이제 2회를 마친 〈부모님 전 상서〉도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35년이 넘는 세월, 30여편의 ‘김수현 드라마’는 한국 방송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시청률 보증 수표’라는 이름표에, ‘김수현 작가론’까지 나올 정도로 한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쳐온 김수현 작가. 김수현과 그의 드라마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우측은 한국방송 〈부모님 전 상서〉 제작 발표회장에 나온 작가 김수현)

가족이 있다

김수현 드라마는 크게 〈청춘의 덫〉(99년)으로 대표되는 비극적 멜로드라마와 〈사랑이 뭐길래〉(91년)를 떠올리게 하는 희극적 홈드라마의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홈드라마는 물론이고, 멜로드라마도 언제나 가족을 기반으로 한다. 〈청춘의 덫〉의 서윤희(심은하)는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며 가족(자식)을 잃자, 변심한 남자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사랑이 뭐길래〉나 최근작 〈내 사랑 누굴까〉(2002년) 〈완전한 사랑〉(2003년)에도 부모를 비롯한 형제자매 등 가족이 주요인물들로 설정됐다.

언어의 연금술사? 가장 뛰어난 작가?
그가 듣고 싶은 찬사는 무엇일까? 아니, 그가 아직 듣지못한 찬사는 뭘까?

신데렐라와 재벌 2세의 러브스토리가 판 치며 부모 형제는 그저 주연을 빛내려는 들러리쯤으로 설정될 뿐 가족이 실종된 게 요즘 드라마의 현상인데 견줘, 김수현 드라마의 가족은 언제나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룬다. 김 작가는 〈부모님 전 상서〉를 앞두고도 “요즘 드라마에 가족이 어디 있습디까? 애비 에미가 있어요? 없어요?”라고 요즘 드라마들을 비판하며, “가족을 통해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을 끝없이 시청자들에게 인식·주지시키는 것이 작가의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면은 간혹 ‘가부장제 옹호’로 이어진다는 비판도 받는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버지(이순재) 등 김수현 드라마의 아버지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의 모습이다. 〈불꽃〉(2000년) 〈내 사랑 누굴까〉 〈완전한 사랑〉 등의 여주인공들도, 겉모습은 가부장을 넘어서려 하나 시아버지 등 시가족 앞에서 또 “여자가~”라는 말 뒤끝에는 순종적으로 바뀌거나 자포자기하고 만다. 〈부모님 전 상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폐아를 낳고 남편에게 외면당하는 안성실(김희애)은 아버지 안 교감(송재호)의 설득에 결혼을 유지하고, 외도하는 남편의 아픔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작가가 현실을 이끌어야 하는가, 아니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야 하는가에 이론의 여지가 있음에도 김수현 드라마에는 이 시대 기성 지식인들의 한계가 드러난다.

촌철살인의 대사가 있다

대사에서 아직까지 김수현을 넘어설 작가는 없는 듯하다. 인간의 감춰진 본성을 예리하게 찔러내는 대사나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로 정확한 인간 심리 묘사에 이르는 독특한 문체는 김수현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로 불릴 만하다.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가 이종원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했던 대사 “부숴버릴 거야”는 한때 유행어가 되기도 했고, 〈목욕탕집 남자들〉(95년)을 비롯한 대부분 드라마에서 출연자들이 숨쉴 틈 없이 내뱉어대는 ‘따발총 대사’는 김수현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대단한 감각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일 테지만 김 작가는 “감각보다 더 중요한 건 인간을 파고드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인간을 파고드는 것’은 깊이있는 취재로부터 나올 터이나 김 작가는 이마저 부인한다. “취재? 난 취재 안 해요. 물론 직업 같은 건 (보조작가에게) 취재를 시키죠. 이번엔 자폐아 부분도 취재를 했지요. 나머지는 그냥 머리 속에서 흘러 나오는 것을 그대로 써내려가면 돼요.”

<부모님 전상서>로 다시 KBS 자막에 오른 김수현을 찬사해본다

결국, 대사는 작가의 말투를 가장 닮았다. “내 말투 들어보면 몰라요? 내가 좀 직설적이고 직선적이잖아요. 어떻게 그 많은 대사들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요?” 솔직한 대답이다. ‘타고났다’는 필력은 작가의 자만심으로 비칠 수도 있으나, 대본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김수현의 대본은 독특하다. 대본의 지문은 연출자의 카메라 앵글이나 배우들의 작은 행동까지 작가의 정확한 의도와 구상을 세밀히 표현한다. 김 작가도 “내 대본 안 봤어요? 피디들도 대본만 보면 그림이 떠오른다고 해요”라고 말했다. 그의 대사에 대한 마니아적 호응 뒤에는 ‘말장난의 천재’라는 악평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김수현 드라마의 언어는 “낮고 저속한 것으로 버려져 있던 말들에 가능한 맥락을 넣어 말들에 씌워져 있는 사회적 위계를 부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의제설정 능력이 있다

무엇보다 김수현 드라마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며 ‘어젠다’까지도 만들어 내곤 한다. 〈부모님 전 상서〉엔 자폐아(안성실의 아들)가 주요 인물로 나온다. 김 작가는 “제 홈페이지에 한 회원이 ‘장애인 다룬 작품이 수십년 동안 없지 않냐’고 썼더라고요. 그래서 ‘그렇다. 미안하다. 기회 되면 한 번 해보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한 팬과의 약속을 지키는 차원이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지만, 요즘 사회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채택하기 힘든 소재다. 요즘 적잖은 부모들이 고민하는 ‘자폐아’ 문제를 방송 드라마 영역에서 다룬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작업이다. 게다가 김수현 드라마가 이 문제를 다룬다면 사회적 영향력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김 작가가 사회적 이슈를 다룬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아들아 너는 아느냐〉(99년)와 지난해 〈완전한 사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들아…〉에선 장기기증 문제가 다뤄졌고, 〈완전한 사랑〉은 동성애자 배우 홍석천을 ‘게이’ 역으로 출연시켜 동성애자 문제를 사회에 환기시켰다. 〈아들아…〉가 끝난 뒤엔 장기기증 서약에 나선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완전한 사랑〉에서 시청자들은 가까이에 있는 동성애자를 처음 목격할 수 있었다. 이밖에 미혼모 문제나 연상녀·연하남의 결혼 등 사회적인 흐름을 반영하거나, 앞서 문제를 지적한 경우는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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