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일기를 쓴 나지니(김선아)와 주요 등장인물인 지니의 역대 애인 명단(이현우, 김수로, 공유)을 보건대 이 일기장의 문체가 웃음기 가득한 발랄한 것이며, 적나라한 성애 묘사엔 별 관심이 없음을 짐작하겠다. 어찌 훔쳐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일기장이 돌연 (지니를 떠난) 이기적인 수컷들을 응징하기 위한 증거 자료로 채택되면서 그나마 일기장에 흐르던 따스한 분위기가 증발되고 우린 어리둥절해진다.
증발되기 전, 처음엔 싱그럽고 풋풋했던 한 에피소드.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사포를 쓰고 성가를 부르는 한 여자의 눈빛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충만하다. 성가대 지휘자 구현(이현우)를 향할 때마다 그렇다. 혹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얼굴을 붉히며, 눈을 제대로 맞추지 않는 나지니(김선아).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볕은 이 풋사랑에 던지는 축복 같다.
성가대 지휘자 구현을 굳이 영어 개인교사로 끌어들인 재수생 시절은 흥분과 낙담이 교차한다. 선생은 <애너벨 리>를 외우고 제자인 지니는 시구를 해석한다. <애너벨 리>를 읽다 말고 한낮의 정사를 나누는 사제지간을 너무 비난하지는 말자. 실수였다는 구현의 구차한 변명과 지니를 사랑했기에 후회없었다는 투의 회상이 철지난 여성지에서 많이 보던 것이라고 타박하지 말자.
지니는 두 번째 남자 정석(김수로)을 만나서 성에 눈뜨고 동거를 감행하더니 세 번째 애인인 연하의 유인(공유)과는 먼저 즐겁게 ‘합체’를 외친다. 초경을 축하하며 엄마(나문희)가 선물한 작은 일기장엔 동시에 눈물과 한숨도 비례해서 늘어난다. 나 몰라라 유학을 떠난 구현, 카레 만드는 방법만 달랑 남기고 떠난 정석,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유인. 과연 이 남자들이 지니를 사랑하기는 한 것일까. 또 지니는 이들을 어떻게 사랑한 것일까. 첫 만남의 설렘과 지루한 신경전 따위는 건너뛰고 곧바로 침대로 뛰어드는 영화는 바로 이런 중요한 질문에 제대로 답을 들려주지 않고 대신 지니가 이들 치사한 수컷에게 펼치는 복수극으로 대신 답한다.
<위대한 유산>에서 ‘백조’의 페이소스와 자격지심을 웃음으로 전환시켰던 김선아는 이번엔 그런 배경없이 그저 욕탕과 화장실에서 분투하며 웃음을 얻어내려 한다. 많이 봐줘도 복학생 이상으로 보이는 대학생 김수로와 엄마에게 유독 절절매는 공유보다, 의외로 이현우가 끊어질 듯한 위태로운 웃음의 리듬을 살려낸다. 말을 듣지 않고 마구 커지기만 하는 성기 때문에 고뇌하는 신부가 그와 퍽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