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날 캣우먼의 자유와 반항의 멋을 놓쳐버린 <캣우먼>
<캣우먼>이 할리우드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명백한 교훈은 아무리 아카데미상을 받은 일급 스타와 유명한 캐릭터를 갖추었다고 해도 좋은 각본, 적어도 좋은 스토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영화화를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제작 전부터 돌아다니던 각본이 모든 사람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았을 경우엔 더욱 그렇고.
<캣우먼>의 각본은 무엇이 문제인가? 단점들을 지적하기는 쉽다. 가장 노골적인 건 악역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초능력을 가진 슈퍼 영웅이 주인공인 영화라면 그에 걸맞은 악역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캣우먼>의 샤론 스톤이나 랑베르 윌송은 어떤가? 윌송은 생각없는 바람둥이에 불과하고 샤론 스톤의 유일한 초능력은 불량 화장품의 부작용으로 얼굴 피부가 단단하다는 것이다. 지금 농담하나?
악당답지 않은 악당과 캣우먼답지 않은 캣우먼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문제점은 악당들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있다. 한마디로 말해 할리 베리가 연기한 페이션스 필립스라는 주인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캣우먼’이라는 캐릭터가 아니다.
기존 캐릭터들을 재활용한 작품들이 모두 원작의 캐릭터에 충실할 필요는 없다. 보수적인 팬들의 원성을 받을지라도 변형된 캐릭터들로 성공한 작품들은 많다. 때로 그런 변화는 의무적이다. 슈퍼맨만 해도 만화 시리즈가 처음 데뷔했던 20세기 중엽과 지금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캐릭터 역시 시대에 맞추어 변형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마시길. <스몰빌>의 클락 켄트는 21세기 초를 사는 젊은이들의 심리와 모습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여전히 슈퍼 영웅계의 보이스카우트인 오리지널 캐릭터의 핵심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어떤 캐릭터가 인기있고 유명하다면 그 캐릭터의 정수는 간직하는 게 좋다. 그걸 날려버린다면 포장만 같고 내용은 전혀 다른 엉뚱한 유사품을 파는 것과 같다. 비싼 돈을 주고 판권을 구입해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페이션스 필립스 양은 어떨까? 언뜻 보면 할 건 다 하는 것 같다. 보석 도둑이고 프로 페미니스트이고 유혹적이고 고양이를 닮은 날렵한 액션을 선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말 많던 고양이옷? 분명히 미셸 파이퍼의 난도질 고양이옷보다는 못했다. 하지만 영화는 배우들의 복지도 고려해야 하고(파이퍼가 <캣우먼> 영화를 거부한 게 그 불편한 옷 때문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안다) 이미 여러 번 등장한 짝 달라붙은 가죽옷에서 벗어나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할 줄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이 영화의 고양이옷은 파이퍼의 고양이옷보다 특별히 원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페이션스가 덜 고양이다운가? 오히려 미셸 파이퍼의 셀리나 카일보다 고양이 짓은 더 한다. 쥐오줌풀이 든 공이 든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개들을 위협하는 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수많은 고양이 짓들 중 극히 일부이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페이션스 필립스는 캣우먼이 되기엔 너무 건전하다. 이 영화의 캣우먼은 마치 페미니스트 이론 강좌를 듣는 대학교 2학년생처럼 행동한다.
<캣우먼>과 페미니즘의 연결성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배트맨> 시리즈의 악역으로 출발했던 이 캐릭터가 당당하게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주역에 설 수 있었던 건 이 캐릭터의 섹스 어필 때문만은 아니다. 캣우먼은 건전한 바른생활 주인공인 원더우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화 세계의 여성 캐릭터에게 자유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의 세계’를 방문하자마자 미합중국이라는 시스템에 종속되어버린 원더우먼과는 달리 캣우먼은 모든 시스템과 법규, 심지어 악당들의 규율에서도 해방되어 있었다. 미셸 파이퍼의 캣우먼이 기가 막혔던 건 파이퍼가 이 극단적인 자유의 쾌감과 고통을 감춤없이 모두 표출해냈기 때문이었다.
할리 베리의 캣우먼은 이 모든 걸 놓쳐버린다. 페이션스 필립스는 자신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대신 남의 머리를 빌린다. 여기서는 반쯤 좌절한 페미니스트 교수로 등장하는 오필리아가 그 ‘머리’이다. 따지고보면 페이션스는 극단적인 자유를 바랄 이유도 없다. 처음부터 처절한 사회적 패배자로 시작한 셀리나 카일과 달리 페이션스는 괜찮은 친구들과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을 사는 평범한 직장 여성에 불과하다. 심지어 페이션스는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기억 못한다. 트라우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페이션스의 캣우먼은 뒤뚱거린다. 자신의 욕망도 약간 채우고, 사회적 의무감도 조금 채우고, 폼도 조금 잡으면서 좁은 울타리 안을 빙빙 도는 것이다. 아마 영감을 얻기 위해 남는 시간 동안 <오프라 윈프리 쇼>도 조금 봤을 것이다. 오프라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법률과 이성을 초월한 절대적인 자유인이어야 마땅할 캣우먼이 오프라 페미니즘 안에 얌전히 갇혀 뱅뱅 돈다면 이것은 예술적 붕괴이다. 도대체 왜 이런 모범 시민이 고양이옷을 입고 자신이 캣우먼이라고 주장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