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주홍글씨>로 돌아온 배우 한석규
2004-10-21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이제 내 얼굴에 인생의 쓴맛이 첨가된 것 같다”

<이중간첩> 개봉을 앞두고 “다음에는 밝은 이야기에서 밝은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고 했던 소망을 한석규 스스로 ‘배반’했다. 그는 <텔미썸딩> <쉬리> <이중간첩> 등에서 맡았던 비극적 캐릭터를 <주홍글씨>에서 격렬하게 되풀이한다. 범죄와 음모에 휘말리는 운명적 캐릭터, 그러나 끝내는 스스로를 회의하게 되는 캐릭터. <주홍글씨>에서 강력반 반장 기훈 역을 맡은 그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세다. 명석한 두뇌만큼 터프하고 자신감에 넘쳐서 아내와 연인을 동시에 거느리는 사생활도, 이제 막 현장에 도착한 살인사건도 거침없이 풀어간다. 문제는 아내(엄지원)와 아내의 친구이자 정부(이은주)와 맺고 있는 삼각관계가 아니라 사진관 여인 경희(성현아)에게서 터져나온다. 그녀 남편의 머리를 백주대낮에 처참하게 짓뭉갠 자가 누굴까? 기훈이 그 범인을 찾는 건 시간문제인 듯했다. 그런데 투명해 보이던 단서가 조금씩 어긋나더니 엉뚱한 데서 오래도록 고인 고름이 터져나온다. 그렇게 자신있던 비밀스런 사생활이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다. 그는 절묘하게 추락해간다. 그리고 정상과 비정상을 오간다. 마치 아내와 정부의 끈적끈적한 침대를 오가듯.

<이중간첩>이 그의 앞에 버티고 선 높은 기대의 장벽을 넘지 못한 탓에 <주홍글씨>는 또 하나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주홍글씨>는 불륜의 치정극과 살인 미스터리를 교차시키는 상업영화다. 그 교차는 긴장과 집중의 고조를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내면 혹은 진실을 비춰주는 거울 노릇을 한다. 그러다가 최후의 순간에 격하게 충돌하면서 교차의 매듭을 거세게 풀어버린다.

그런 영화의 모습이 이즈음의 한석규를 닮았다. 거침없음과 깨달음 사이에서 고통을 겪다 마침내 매듭을 잘라버리고 나선 것 같은.

그를 부산영화제가 막 열린 해운대에서 만났다.

<주홍글씨>가 부산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하고 영화제에서 만났으니 이에 대한 질문부터. 개인적으로, <접속>이 제1회 부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됐을 때 관객 반응이 아주 좋았고, 그것이 그대로 흥행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영화제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나.

개인적으로 페스티벌을 부담스러워한다. 반대로 말하면 관심이 없다는 뜻도 된다. 해외영화제는 가본 적이 없다. 부산은 1회 때 왔었는데 올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그런 게 오히려 인상에 남는다. 아파트가 많아지고, 없던 다리가 생기고. 전에는 공항에서 해운대쪽으로 오는 데 요금을 한번 내면 됐는데 이번에는 3번을 냈다. 그게 인상 깊다. 나중에는 몇번을 더 내야 할까? (웃음)

<주홍글씨>에서 기훈은 센 사내다. 우리가 아는 한석규의 이미지와 달리 영화에서 그 이미지를 꽤 오래도록 밀어붙인다. 어땠나, 힘들지 않았나.

악역을 하면 쾌감을 느낀다. 악역이라면 <넘버.3>의 태주, <서울의 달>의 홍식, 그리고 <주홍글씨>의 기훈 정도를 들 텐데, 이번에는 그런 인물을 해보고 싶다기보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러고보니 인물 때문에 영화를 했던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기훈 역을 하면서 쾌감을 느낀 것도 있는 반면에 어려웠던 것은…, 음~, 없네. 한석규라는 인간을 변주하고 왜곡한 것이지 완전히 다른 걸 한 건 아니다. 앞으로는, 나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가서 할 수 있을지 궁금한데 그런 걸 해보고 싶다. 나로부터 완전히 탈출해서, 초탈한 그런 느낌을 갖고 싶다. 그에 비하면 이번 기훈은 변주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해서 말인데 솔직히 ‘불륜’으로 당분간 뭘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주홍글씨>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 같다.

결혼 전에는 관객에게 해주고 싶다는 걸 못 느꼈던 이야기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 하려는 사람들, 했던 사람들에게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밝고 긍정적인 쪽보다 어둡고 추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앞으로 더 들려주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틈틈이 더. 그런 작업을 통해 역으로 사랑의 좋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주홍글씨>는 기훈이 사랑이란 소재를 통해 성장하는, 남자어른의 성장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훈이 믿었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기훈이 연인과 나란히 누워 “나도 (아내) 사랑하고, (아내도) 날 사랑해”라고 힘주어 말하는데 그는 바람을 피우면서도 무엇을 믿고 싶었던 걸까.

성장영화라? 맞는 말이다. 옛날 <서울의 달> 대사 중에 명대사라고 생각했던 게, “사람은 누구나 제비 한 마리쯤 키우고 있다”고 홍식이 말하는 대사였다. 굉장히 좋은 대사인 것 같다. (현실에선) 속에 있는 제비를 날릴 것이냐 아니면 속에서 삭이고 삭여서 말려죽일 것이냐의 차이다. 이번 작품에선 여러 마리를 날려도 자신있게 날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다. 얼마든지 날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제비를 다 예쁘고 행복하게 날려줄 수 있다고 믿는. 그것을 완벽한 사랑이라고 믿는 인물이다. 그런데 기훈은 계속 잘했을 것이다. 여기서 두집 살림을 하지만 다섯집 살림을 해도 완벽하게 모든 여자를 다 사랑했을 것이다.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를 통해서 자중하자, 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웃음)

그런 기훈이 자기가 다루는 사건과 본인이 겪는 개인적인 사건을 통해 마지막에 뭔가를 깨달은 모습이다.

영화의 헤드 카피가 ‘어긋난 사랑의 대가’다. 어긋난 사랑은 치우고, ‘대가’다. 내가 내뱉었던 말들, 했던 행동들의 모든 결과물. 영화에서 사랑을 통해서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랑을 떠나서 모든 말과 행동들이 부르는 책임과 결과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주홍글씨>를 만든 게 아닐까. 작품 하기 전에 감독님과 궁합이 잘 맞고 서로 너무 좋아했던 게 이런 것에 의기투합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근데 이거 좋은 답이 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꾸 선문답하는 것 같다.

비록 누군가 죽지만, 그 대가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다루려는 듯했다.

그가 이 사건을 겪으므로 해서 앞으로는 달라지니까? 긍정적인 대가로 볼 수도 있겠네. 그래도 그가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반성하고 착하게 산다?

비로소 애욕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 게 아닐까 하는 것인데, 그 마지막의 이미지가 배우 한석규의 평소 이미지와 맞아떨어진다.

근래 부쩍 들어서 내가 쌓아왔던, …내가 쌓아온 건가? 그런 것에서 다 그만두고 싶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제는 그만! 앞으로 얼마나 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걸 해보고 싶다. 악역이든 뭐든. 나이가 한두살 더 먹으니까 성장영화랄까 그런 걸 하고 싶다. 그러면 불륜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려나?

성현아의 캐릭터가 특히 그랬는데 여성 캐릭터를 통해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에 대해 한수 가르쳐주려 했던 건가.

맞다. 그렇다. 잘못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는 남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

영화 후반부의 차 트렁크 장면은 언뜻 굉장히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테마를 건드려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힘들게 찍었을 것 같다.

굉장했다. 아주 끔찍했다. 시나리오 봤을 때부터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장면이다. 촬영하면서 문득문득 스탭들에게 물었다. 이 영화에서 어떤 게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십중팔구 다들 이 장면을 이야기했다. 관객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고 싶다. 한번 지옥을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 찍기 전에 은주랑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다, 지옥문을 열어보자고 했다. 3일간 찍었는데 너무 힘들었고…. 결과는 모르겠다.

<이중간첩>에서 고문받을 때 뒷모습 누드를 보여줬는데 이번에는 좀더 자주 보여준다. 그 점에서도 <주홍글씨>는 센 영화다.

그렇다. 트렁크를 열었을 때, 모르겠다, 직감적으로 벗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에는 옷을 걸치고 있다. 감독에게 벗고 싶다고 제의했다. 떡볶이처럼(웃음), 피를 흠뻑 뒤집어쓴 상태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너무 센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신들은 이은주와의 베드신들인데 시나리오에 강력하게 써 있다. 찍으면서 진솔한 베드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나는 베드신이 있는데,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의 식탁 위 베드신, <몬스터볼>의 베드신 같은 것. 맨 처음 베드신을 읽고는 <포스트맨…>의 장면을 떠올렸다. 두 인물의 감정이 관객에게 딱 다가가는 장면이 돼야 할 텐데, 그 걱정만 했다. 살아 있는 베드신이었으면 했다. 이은주랑 같이 벗었다, 가 아니라. 어땠나?

…예뻤다.

예쁘면 안 되는데…. 쉽지가 않더라고. (웃음)

같은 남자로서 보기에 왜 기훈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을까.

잘난 척해서 그렇지 뭐. 똑똑한 척하고. 그러다가 대가를 받은 거지.

1995년에 영화 데뷔작 <닥터 봉>을 내놨지만, 실제로 영화 카메라 앞에서 선 지 10년 됐다. 소회는.

많이 좋아졌다. 연기가. (웃음) 이제 좀 볼 만하다. 얼굴도 괜찮아진 것 같고. 전에는 인생의 쓴맛이 없는 얼굴이었는데. 시사 때 내 연기,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 좀 쓸 만해졌다는 걸 느꼈다.

예전에 보여줬던 신중함에 비하면 굉장히 과감하게 작품을 선택하고 밀어붙이는 쪽으로 바뀐 것 같다(그의 차기작이 사실상 제작에 들어갔다).

그렇지는 않은데. 앞으로도 궁합이 맞으면 또 모르겠지만. 이제는 게임 자체를 좀 폭넓게 하고 싶다.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어려서 볼 수 있는 시야가 좁았던 것 같다. 이제는 좀 넓어진 것 같다. 상대방이 경계하는 것도 잘 보이고, 감독이 지시하는 것도 잘 들리고, 경기를 보고 있는 관객도 잘 보이고. 점점 시야가 더 넓어지겠지. 그 경기 자체를 즐긴다고 할까, 행복하게 생각하면서 경기를 하고 싶다. 경기의 중반전을 뛰었고, 이제 후반전에 들어가는 건데, 후반전이 더 중요하다. 전반전 때는 내리 달리기만 했다. 골대는 저기다, 하고 지르기만 했는데 이제는 패스도 좀 하면서 하려고 한다. 기쁘고 멋진 경기를 해서 잘 마무리하고 싶다.

데뷔 초반 무렵 함께 일했다가 최근 다시 작업하게 된 영화인들에게 물었더니 ‘원래 적극적이지만 더 적극적이 됐다’, ‘이전에 접근하기 어려웠는데 좀 유들유들해졌다. 그러니까 편해졌다’ 등의 평을 꺼내더라.

나도 들었다. 무슨 의미일까, 좋게 이야기하면 관리를 잘했다는 건데,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까 이야기한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하는 뜻이 아닐까. <접속> 하고 그럴 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참 불안불안했는데, 두드리고 또 두드려보고 갔으니까. 지금도 두드리긴 하지만 전에는 열번 두드릴 거, 이제는 한번 두드려보면 딱 나온다. 내가 했던 것을 싫어한다기보다 좀더 중요한, 그리고 좀더 궁극적인 쪽으로 가고 싶다. 역시 남자배우는 40이 넘어야 한다는 말이 맞다.

궁극적인 걸 하고 싶다는 게 무슨 뜻인가.

하고 싶은 캐릭터가 하나 있다. 조신이란 인물. 이인모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이중간첩>을 통해서 어느 정도로 풀어냈고. 연극으로 <조신의 꿈>이 있는데 이 불교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조신의 꿈>은 지금 절실한 욕망이 결국 고통의 근원이며 미래의 굴레가 된다는 설화). 정확히 말하면 배창호 감독님의 <꿈>을 리메이크하는 거다.

왜 조신인가.

그 이야기가 좋으니까.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또 이런 이야기도 한번 해보고 싶다. 내 처가 나의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 근데 어떤 여인을 만났는데 아니었던 거다. 이 여자가 진짜 사랑인 거 같다. 그러면 어떡하나? (웃음) 이걸 어머니에게 한번 농담처럼 물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냐고. 평소 같으면 바로 뭐라고 했을 텐데, 심각하게 오래 생각하시더니 ‘그럴 때는 산에 가라’ 하시더라. (웃음) ‘산에 가서 그러면 안 된다, 맘을 가다듬고’ 오라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면 아내에게도 말을 건네봤을 텐데.

아내한테는 아직 말 안 했는데, 이거 오늘 가서 해야겠네. (웃음)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영화에서 장르의 다양성을 확장시켜오는 데 주도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로 새로운 멜로를, <텔미썸딩>으로 스릴러다운 스릴러를, <쉬리>로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은행나무 침대>에선 CG와 판타지영화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와 함께 한국의 장르영화가 성장해왔고, 장르별로 태어난 또 다른 최고의 배우들이 그뒤를 잇고 있다. 이제 당신의 작품 선택 기준은.

장르에 구애받고 싶지 않다. 모든 장르를 다 해보고 싶다. 독립영화도 해보고 싶고. <도그빌>을 보고는 그런 영화도 해보고 싶었다. 장르보다는 이야기다. 건방진 말 같지만 영화는 이야기가 전부인 것 같다. 두 시간 동안 관객에게 자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고 들려주는. 고정관념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끝으로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예전에 “연기를 하는 것보다 안 하는 연기가 더 힘들 듯이 인터뷰도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힘들다”고 했다. 왜 그렇게 인터뷰를 안 하려고 하나(이번 인터뷰도 길고 긴 난항을 거쳐 성사됐다).

하면 다 하고 안 하려면 다 안 해야 하는데, 그거 대가 아닌가. 배우라는 일은 말보다는 몸으로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말로, 언어로 하는 직업이듯. 그리고 말이라는 게 5년 정도 지나니까, 내가 했던 말들이 다 쓰레기 같은 말들이었다. 그때는 내 잘났다고 떠들었던 말들인데, 좀 지나고 보니 다 쓸데없는 말들뿐이었다. 그래서 느꼈던 게 말보다는 몸으로 하는 직업이구나, 였다. 배우로서 행로가 중요하지 어떻게 어떤 연기를 했느냐, 인생이 어떠냐 하는 게 뭐 중요할까. 내가 이렇게 2004년에 <씨네21>과 인터뷰한 걸 누가 기억해주겠나. 말보다는 몸으로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인터뷰가 싫다. 대가도 치러야 하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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