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스텝포드 와이프>의 조안나
2004-10-22
글 : 정이현 (소설가)
승승장구 현모양처 아줌마들 “음매 기죽어”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일찍이 푸쉬킨은 그렇게 말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 철수와 영희가 함께 극장을 찾아 개봉영화를 보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었다. 일상은 전쟁에 가까웠다. 어언 수 년 만에, 단 둘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다소 흥분했다. “자기야, 우리 무슨 영화 볼까? 니콜 키드만 나오는 거 볼까?” 영희가 소녀처럼 재잘거렸다. <스탭포드 와이프>? 제목에 ‘와이프’ 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는 게 어째 좀 꺼림칙했지만 별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철수는 기꺼이 표를 끊었다. “니콜 키드만은 이혼하고 나서 더 멋있어진 것 같아. 지질한 결혼생활보다는 아무래도 혼자가 편하겠지?” 영희가 슬쩍 그의 동의를 구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으나, 후환이 두려워 철수는 짐짓 못 들은 척 했다.

“아아, 누가 나 좀 스텝포드 마을에 안 데려가 주나?” 영화가 끝난 뒤, 영희가 긴 탄식을 섞어 말했다. 철수는 의아했다. “당신, 그게 무슨 소리야? 평소에 나한테는 아마조네스 여전사처럼 굴더니. 지금, 로봇으로 사는 그 여자들이 부럽단 말이야?” 영희가 입을 삐쭉댔다. “그래. 부럽다면 어쩔래? 현모양처는 뭐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마누라가 저렇게 꽃같이 치장하고 편히 들어앉으려면, 남편이 한달에 얼마나 벌어야 되는지 몰라서 그래?” 불시에 한방 맞은 철수가 바로 반격했다. “어이구, 꿈 깨셔. 거기 사는 그 여자들, 하나같이 사회적으로 엄청 성공한 여자들이라잖아. 조안나는 방송국 CEO였고, 베스트셀러 작가에, 항공사 사장에... 또 다들 얼마나 쭉쭉빵빵한지. 솔직히 당신은 거기 들어갈 기본조건조차 안 된다고.” 영희가 철수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말이 났으니까 얘기지만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멍청이 같은 남편들과는 달라. 사내놈들이 오죽 못났으면 마누라 잘 나간다고 열등감을 느끼냐. 성공한 와이프 둔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데.” “흥, 여우같은 요즘 남자들 본심을 누가 모를 줄 알고! 돈도 잘 벌고, 살림도 잘 하고, 애도 잘 키우라는 거 아냐? 그러면서 지들은 여전히 손 하나 까딱 안하지. 차라리 집에서 곱게 살림만 하라는 스텝포드 남편들이 순진한 거라고!” 영희의 힐난에 철수는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극장 문을 나서자 어느새 먹먹한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영희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조안나인지 뭔지 그 여자. 여러 가지로, 평범한 아줌마 기죽이는 캐릭터더라. 자기가 겪은 얘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서 에미상을 휩쓸었다니. 휴. 솔직히 당신도 조안나같은 여자랑 살고 싶지?” 철수가 가만히 영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그런 완벽한 여자보다 나한텐 당신이 훨씬 더 예뻐.” 살다보면 때론 진부한 거짓말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허황한 영화 한편보다는 확실히,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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