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주홍글씨>로 돌아온 한석규
2004-10-22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야죠”

한석규의 연기엔 한석규만의 트레이드마크가 없다. 입이 벌어져 귀밑까지 올라가는 최민식의 웃음, 턱이 떨어져나갈 듯한 설경구의 절규같이 어느 순간에 불가항력처럼 드러나는, 그 배우만의 표정이 있다. 한석규에게선 그게 잘 찾아지지 않는다. 절제된 그의 연기는 희노애락의 감정선을 탈 때도 한석규의 체취를 남기지 않는다. 이건 그 자신의 말처럼 “배우가 저마다 달라 어느 게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단점을 비교해볼 순 있지 않을까.

90년대 후반 한국영화의 명실공히 ‘넘버 원’ 스타였던 한석규보다 한발 늦게 부상해 지금 톱이 된 최민식, 설경구, 송강호의 연기는 한석규와 비교하면 확실히 과잉이 있다. 가끔씩 드라마 밖으로 튀어나갈 것같은 위태로운 순간을 맞는다. 다시 드라마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그 잠깐 동안에 관객은 극중 인물을 떠나 배우를 보게 되는데 그게 나름의 묘미를 준다.(드라마 밖으로 나가버려 느끼해지거나 겉도는 경우가 더 가끔씩 있기도 하다.) 이와달리 한석규 연기의 에너지는 드라마의 감정선을 타고 영화 속으로 고스란히 흡수된다. 그래서 드라마의 안정감이 더해지지만 배우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덜해지는 역설이 생긴다.

피의자 얼굴 핥는 위악적 형사

10번째 출연작 <주홍글씨>는 약간의 변화를 보인다. 주인공 형사 기훈은 거울보며 악마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하고, 피의자의 얼굴을 핥는 위악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때 드러나는 섬뜩한 기운은 드라마를 압도하는 느낌을 줄 정도로 세다. “그건 다 시나리오에 있던 거다. 연기할 때 부담스러웠다. 아, 얼굴 핥는 건 내가 한 거네. 내 느낌으로 한 건 안 그런데,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대로 한 건 영화볼 때 뜨끔뜨끔하다. 왜 그러지? 참….” 한석규에 따르면 이건 모두 기훈이라는 인물의 자만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스스로 의도한 연기의 변화는 이랬다.

보통사람이 겪는 특별한 사건

“이번엔 미리 계산하기보다 현장에서 상대방 배우의 액션에 리액션을 쳐주려고 했다. 예전 같으면 상대방 배우의 액션까지도 미리 계산했는데…. 기훈은 부인, 애인 등 상대하는 인물이 많은데 그들을 다 다르게 대해야 하니까. 또 <쉬리> <이중간첩>의 주인공들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의 인물인 데 반해 기훈은 가장 잘 나갈 때의 인물이다. 그래서 (연기의) 운신의 폭이 넓다. 감정의 고저장단을 세게 변주할 수 있고.” 그는 “지금은 그렇게 (연기할) 때가 아닌가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좀 더 자유롭게 연기하고 싶다는 말일 듯한데 <주홍글씨>에서 한석규의 변화는 크지가 않다. 또 그게 영화를 빛낸다. <주홍글씨>는 특별한 인물이 그 특별함으로 인해 겪게 되는 사건이 아니라 (한석규의 표현대로) ‘보통 사람이 겪는 특별한 사건’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한석규가 연기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대다수가 사람이 특별하기보다, 특별한 사건을 겪는 보통사람이다. <파이란>의 최민식, <공공의 적>의 설경구,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처럼 밑바닥 인생 또는 구악경찰이 아니다. <은행나무 침대> <접속> <쉬리> <이중간첩>처럼 반듯한 장르영화에 반듯한 인물을 연기했다. 알 파치노나 로버트 드 니로보다 해리슨 포드나 톰 행크스를 떠올리게 하는 역할이다. “역 때문에 영화를 선택한 적이 없다. 이야기를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역이다. 나는 영화는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촬영 전에 “이 영화의 주제가 뭐냐를 한 문장으로 자꾸 정리한다”는 그는 <이중간첩> 때도 “그걸 꼭 관객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먼저 생각하면서 연기를 절제하고 가다듬는 습관이 그에게 밴 듯하다. <주홍글씨>에서도 그는 “(기훈이) 특별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의 변화는 더디고 신중하다. 그래서 신뢰가 간다.

민식이 형이랑 하나 하고 싶은데‥

달리보면 한석규가 활발하게 출연하던 90년대 후반은 한국영화가 여러 장르 영화의 외향을 갖춰가기 시작하던 때였다. 좀더 발전해 개성 강한 캐릭터의 질감이 살아나는 영화들이 나오던 2000년부터 3년간 그는 쉬었다. 올해들어 매니저 없이 혼자 작품을 고르기 시작한 그는 “모든 장르, 모든 인간 군상을 다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되도록이면 전작들과 다른 장르. 장르가 달라지면 연기도 달라지니까. 조금씩 다른 변주를 하면서.” 오래도록 단짝이다가 최근에 소원했다는 최민식과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고, 한국에서도 <오션즈 일레븐> 같은 영화도 나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말도 했다. <주홍글씨>는 한석규가 본격적으로 재기함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다.

<주홍글씨>는...천국에서 나락으로 한 남자의 악몽 그려

똑같은 욕망이 판타지를 낳을 수도 있고, 악몽을 꾸게 할 수도 있다. <주홍글씨>는 후자다. 경찰 강력반 반장인 기훈(한석규)은 부인(엄지원)과 단란하면서도 따로 애인(이은주)을 만난다. 이 위태로운 행동을 능숙하게 해나가던 와중에 한 살인사건과 마주친다. 사진관 주인이 살해됐고 기훈은 그 부인 경희(성현아)를 의심한다. 정숙해 보이는 외모 안에 종잡기 힘든 매력을 내뿜는 경희에게서 불륜의 냄새를 맡는다. 그러는 사이에 애인과 불화가 생기고, 부인마저 자신의 여자관계를 알게 된다.

영화는 기훈과 두 여자의 삼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과, 사진관 주인 살해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을 교차편집하면서 동시에 중계한다. 두 사건은 이렇다할 연관성 없이 끝까지 평행선을 달린다. 그걸 매개하는 건 기훈의 심리다. 스스로 불륜을 맺고 있으면서 경희의 불륜을 캐고, 또 그 경희에게 욕망을 느끼는 자신을 보면서 기훈은 혼돈 속에 빠져든다. 그 심리적 혼돈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실생활의 혼돈이 겹친다. 설상가상으로 기훈과 애인이 장난치다가 자동차 트렁크에 갇히고 거기서 기훈은 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주홍글씨>는 행복의 정점에서 혼돈의 미로에 빠져 나락으로 치닫는 한 남자의 악몽을 다룬, 그 악몽의 설계도를 전시하는 영화다. 이걸 불륜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또는 남자가 팜므파탈(요부)에 의해 망가지는 장르영화의 틀 안에 담는다. 교차편집도 세련됐고 재즈 콘서트, 클래식 연주회, 웰빙 디자인의 오피스텔 등을 요긴하게 활용한다. 비극이 벌어질 때와 그 뒤의 정서적 감흥이 약한 아쉬움이 있지만, 지독할 만큼 끝까지 가는 이야기를 세련된 틀 안에 깔끔하게 담아낸다. <인터뷰>에 이은 변혁 감독의 두번째 연출작이다. 2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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