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몰래카메라로 찍고 싶은 그녀, 의 김선아
2004-10-27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김선아는 눈물이 많지 않은 배우다. 울지 않는다, 가 아니라 울지 못한다, 고 말하는 김선아는 <S다이어리>를 찍으면서 “울보라고, 어울리지도 않는 별명”을 얻었다. 한달 반 동안 영화를 준비하면서 그 자신의 감정을 밑바닥까지 쏟아넣은 <S다이어리>는 스물아홉살 지니가 겪은 성장의 기록이면서 서른살 김선아가 기억해낸 옛 감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초반에 이 영화를 찍었으면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선배들이 그러더라고요. 배우는 뭐든 다 겪어봐야 한다고. 여자들은 열네살이나 열다섯살쯤, 초경 시작하면 어른이 됐다고 믿는데, 저는 지금은 스물여덟, 아홉은 먹어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이 먹어서 나쁜 점도 있어요. 사람 만날 때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 나가요. 전에는 무조건 좋아했는데.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먹기는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거죠.” (웃음) 영화로 시작됐던 대화는 그처럼 김선아 자신의 이야기로 끝이 나곤 했다. <S다이어리>는 김선아를 아는 사람들이 말해주었다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찍은 몰래카메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제목 때문에 섹스코미디로 오해받고 있는 <S다이어리>는 남자친구에게 차인 지니가 지난 사랑을 돌아보는 영화다. 세 남자를 차례로 찾아간 지니는 그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믿고선 추억을 보상받기로 결심한다. 섹스의 횟수와 장소, 만족도까지 세밀하게 계산해 작성한 청구서. 김선아는 꼼꼼하기 그지없는 지니의 다이어리를 쓰기 위해 거의 날마다 권종관 감독을 만나 경험과 감정을 나누었다. “감독님도 남자니까, 잘 모르는 여자의 마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여자는 특별한 날 함께 있었으면 하는데, 남자는 뭐 일일이 그래야 하나, 그러잖아요. 남자들은 큰 거 한방이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싸울 때도 남자들은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 여자들은 말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김선아는 <S다이어리>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기 시작했고, 감독과 함께 내레이션을 쓰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평범한, 누구나 할 수 있을 이야기. 그러나 김선아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만큼 잊고 싶었던 기억을 모두 끌어올렸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헤어진 다음에 쭉 마음을 닫고 살았어요. 전에는 일도 하고 사랑도 했는데, 이제는 일만 해요. 이렇게 일만 하다가 뭐가 남을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진짜 신기해요. 영화를 절반 정도 찍고 나니까 상처가 혼자서 완치된 것 같은 거예요.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졌어요.” 김선아는 <S다이어리>의 지니와 함께 과거로 흘러들어갔다가 혼자 상처를 치료하고 남은 시간을 바라보는 여정을 밟아왔다.

그처럼 애정이 담긴 영화지만 서운할 때도 있다. 김선아는 <S다이어리>를 본 남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야하지 않더라”고 말할 때마다 속상해진다. “아니, 내가 이만큼 벗었으면 됐지, 얼마나 더….” (웃음) 그러나 김선아는 <S다이어리> 이전에도 오랫동안 오해받아온 배우였다. 유독 날씨가 쌀쌀했던 지난 5월, <S다이어리> 현장을 찾은 어느 기자가 그녀에게 “이번에도 망가지는 역이에요?”라고 물어보았었다. 열심히 밥을 먹다가, 망가진 적 없는데, 조금 풀이 죽어 중얼거리듯이 했던 대답. 김선아는 “창피한 일이기도 하지만, 계산이나 설정을 할 줄 몰라서, 자연스럽게 행동”했는데도 언제나 망가진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받곤 했다. 코미디에 능숙하다고, 혹은 코미디만 할 줄 안다고. 그 때문인지 지니가 몰래 결혼해버린 남자친구가 남긴 비법에 따라 카레를 만들고, 그 카레를 목이 메이도록 퍼먹는 장면에선, 관객은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거 진짜 슬픈 장면이에요. 카레 먹으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목에 걸려 기침도 많이 했다니까요. 옆에 있던 여자 스탭들도 다 울었어요.” 그러나 관객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니가 통장에 담긴 돈 3천만원으로 변해버린 추억 때문에 울 때, 오해받아온 그녀의 귀여운 얼굴은, 정말 서러운 눈물을 쏟아낸다.

아주 오래 영화를 기다려온 김선아는 <예스터데이>로 물꼬를 트고선 쉴새없이 영화를 찍어왔다. 신인 시절 찍었던 CF 이미지처럼 서늘해 보이던 <예스터데이>, 꽃무늬 치마를 입고 수줍게 첫사랑 선생님을 기다리던 <몽정기>, 로맨스를 꿈꾸지만 중년 조폭 아저씨나 얻어걸리던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동전 몇개를 두고 집요한 근성을 발휘하는 <위대한 유산>. 신기하게도 그 모든 영화를 찍을 때마다 김선아는 실제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어쩌면 그녀의 한계가 아닐까. 그러나 김선아는 다르게 생각한다. “연기를 한다, 이런 생각은 별로 안 해요. 지금까지 쌓인 경험 위에 연기가 더해지면 그게 좋은 거겠죠.” 그래서 김선아는 <S다이어리>를 찍자마자 뛰어든 액션영화 <잠복근무>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잠복근무>는, 지금은 내용이 비밀이거든요. 음… 여형사인데, 씩씩하고 집요하고, 그런 캐릭터예요. 사실 저도 집착은 아니고… 중독이 잘돼요. 대충대충 못 넘어가고.” 평범한 여자로 보여야 한다는 권종관 감독 때문에 살도 못 빼고 토실토실한 모습으로 <S다이어리>를 찍은 김선아는 그처럼 집요하게 고된 촬영을 견디면서 다시 살이 빠졌다. 자갈밭에서 넘어져 무릎에는 빨갛게 핏자국도 올라 있다. <S다이어리>와 함께 한 고비를 넘은 김선아는 “다른 일에는 신경을 끄고 연기만” 하겠다고, 처음과 달리 기운차린 모습으로 스튜디오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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