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나의 남편이 나를 데리고 스텝포드 마을로 가주었으면 한다. 아무리 치워도 티 안 나는 좁은 집과 아침마다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방금 감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도 수습 못하고 나오는 생활에서 나는 ‘여성의 자아실현’을 외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차라리 자신이 전업주부가 될지언정 ‘여성의 자아실현’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페미니스트 남편 덕에 본의 아니게 자아실현을 하면서 살고 있다.
얼마나 멋진가. 넓은 집, 잘 꾸며진 정원에 잘 차린 옷차림으로(그러나 영화처럼 루시 아줌마 스타일만 허락된다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기는 하다) 저녁 때는 무엇을 먹을까만 생각하고 산다면 세상에 무슨 고민이 있을까. 게다가 이 마을에만 가면 아이들은 내버려두어도 지들끼리 알아서 잘하는 걸 보니 재학생 모두가 전교 1등을 하지 않을까 싶다.
<스텝포드 와이프>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다. 요즘 남자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 영화는 잘못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었다. 물론 요즘 남자들 여전히 예쁜 여자 좋아한다. 예쁜데 말 잘 듣는다면 더 좋다. 그런데 거기에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뻔하다. 경제력이다. 물론 대한민국 1%의 남성들은 스텝포드 뺨치는 집 안에서 그림처럼 앉아 있을 여성을 찾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에도 경제력의 조건은 빠지지 않는다. 여자 부모의 경제력이다. 당연하게도 이 경제력의 규모는 ‘여성의 자아실현’을 요구하는 남성들의 기대보다 훨씬 더 큰 스케일이다.
영화를 보면서 시종 궁금했다. 조안나(니콜 키드먼)가 회사에서 잘렸을 때 그 밑에서 일하던 남편 월터(매튜 브로데릭)는 함께 은퇴를 하고 스텝포드로 이사를 간다. 한눈에도 럭셔리해 보이는 이 마을에서 이들은 어떻게 먹고살았을까. 실업수당? 턱없다. 그동안 조안나가 벌어놓은 돈? 혹시 부인을 거대하고 화려한 집 안에 가둬놓기 위해 월터 혼자 낮에는 회사 다니고 밤에는 대리운전 알바를 하며 돈을 번 건 아닐까? 만약 세 번째 스토리라면 이 영화는 여성들에게 끔찍한 영화가 아니라 남자들에게 끔찍한 영화다. 남편이 투잡이 아니라 스리잡을 해서라도 떼돈을 벌어 나를 스텝포드 마을에 데려간다면 나는 다만 고맙겠으나 이럴 경우 아마 98%의 남편들은 ‘여성의 자아실현’을 새삼 강조하고 나서지 않을까 싶다. 하나 더. 자신의 아내를 로봇으로 만들어서라도 스텝포드에 데려갈 남자가 어딨겠나. 그 능력과 마인드라면 차라리 쌔끈한 순종녀를 찾고 말겠지. <스텝포드 와이프>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를 몰라도 한참은 모르고 만든 아둔한 영화다.
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