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야, 안녕? 며칠 전, 우연히 네가 펼쳐놓은 일기장을 봤어. 내 친구들 중에서도 간혹, 색색의 볼펜을 동원하여 하루 일과를 꼬박꼬박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애들이 있긴 하지만 너도 참 만만찮은 강적이더구나. 어쩌자고 그걸, 그렇게 ‘숙박 문제’ 위주로 적어둘 생각을 했던 거니? 식도락 중심의 일기나 문화생활 중심의 일기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영국에 사는 브리짓 존스 언니의 일기처럼 그냥 너의 담담한 일상과 생활 속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써두었더라면, 훔쳐보는 사람 입장에선 읽을 맛이 훨씬 더 쏠쏠했을 텐데 말이야. 그러기엔 혹시 ‘그들과 보냈던 밤’이 네 무의식 속에서 어떤 억압과 압박으로 작동했던 건 아닌지 궁금하다.
남친과 ‘선’을 넘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이거 내가 손해 보는 건데’ 싶어 마음 깊은 곳에서 불안해하는 언니동생들. 우리 주위에 정말 많잖아. 어쩌면 그래서 너도 같이 먹은 음식 보다, 같이 본 영화보다, 같이 잔 장소를 적어두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옛 ‘남친들’ 혹은 ‘여친들’ 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 사실 누구나 할 수 있거든. 그런데 그들한테 보낸 네 청구 내역이 하필이면 성생활에 국한되어 있어서, 구경하는 언니 가슴이 찢어지더라. 상대에게 감정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고, 시간을 물어내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거잖니. 세상 어떤 남자들도 옛 여자한테 ‘횟수’를 기준 삼아 ‘돈’을 물어내라고 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 피해의식은 없을 텐데. 어쩐지 좀 불공평하고 억울하지 않니?
또, 네가 청구서를 날린 시점이 애매하기는 했어. 아무리 실연의 상처가 커도 그렇지. 너, 신문도 안 보는 거야? 요즘 성매매 특별법 때문에 여기저기 들썩거리는 판국인데, 이 와중에 ‘내가 공짜여서 사랑했니?’ 라고 직격탄을 날리면 어쩌자는 거야. 열애중이거나 열애경험이 있는 전국의 여성동지들은 네 의도와 달리 너한테 감정이입하기를 거부할지도 몰라. “아니, 지금 여자의 몸을 ‘화대’로 환원하자는 거야? 그런 거야?” 라고 흥분할 가능성도 상당히 농후하다고 봐.
그런데, 지니야. 너보다 겨우 몇 살 더 먹은 이 언니는 네 복잡 미묘한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돈 안준다며 그 남자들 상대로 유치한 복수 행각 벌인 것, 사실 전부다 네 꿈이었지? 좌충우돌 얼간이 같은 소동을 통해서라도, 파란만장한 이십대를 떠나보내는 푸닥거리를 한바탕 거하게 하고 싶었을 거야. 꿈에서 깨어나 오래된 피아노 앞에 꾸부정하게 앉은 너는, 이제 홀로 서른 살을 맞이해야 하지. 혼자 견뎌가야 하는 길고 긴 시간들이 막막하고 많이 두렵겠다. 그러고 보니 스물아홉 살 여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영화들 숱하게 봐왔지만, 너처럼 시작과 끝이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애는 처음이네. 끔찍하게 지루한 현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