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리투의 두 번째 영화 <21그램>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21그램>은 어긋나는 편집의 마술에 힘입은 조각 짜맞추기와 같다. 잘게 쪼개진 이 멜로드라마는 적극적인 관객을 필요로 한다. 뉴욕필름페스티벌 언론시사회에서도 영화 내내 서로에게 소곤거리며 설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젊은 멕시코 감독의 2000년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만큼이나 현란하지만 덜 잔인한 <21그램>(<아모레스 페로스>를 쓴 기예르모 아리가가 시나리오를 썼다)은 미국 어딘가에서 함께 침대에 있는 폴(숀 펜)과 크리스티나(나오미 왓츠)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약 2시간을 들여 영화는 그 장면 전후의 사건들을 보여준다. 처음 30여분간 영화는 배우자들, 아이들, 병원, 마약 그리고 고통받고 있는 폭력배 전과자이자 개종한 오순절 교인 잭(베니치오 델 토로)이 나오는 설명하기 힘든 일련의 상황들을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게, 하지만 흥미롭게 보여준다.
이냐리투의 카메라는 이야기의 흐름보다 개개의 인물들에 밀접하게 주목한다. 영화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트래픽>(역시 스티븐 미리온이 편집을 했다)과 비슷하게 일련의 날카로운 삽화들로 풀려나간다. 폴은 심장이식을 기다리며 정자를 기증하고 또 한순간엔 얻어맞아 고생한다. 크리스티나는 초췌한 얼굴로 마약에 취하고 상쾌하게 아이들을 학교로 보낸다. 폴의 화난 아내(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죽어가는 남편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한다. 잭은 감옥에서 초췌해지고 목의 문신을 컨트리클럽 사람들이 싫어해 캐디 일을 잃는다. 정리되지 않은 일순간의 인과관계들이 마구 섞여 있지만 가느다랗게 지탱되고 있는 어떤 안전감이 곧 무너져버릴 거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아모레스 페로스>처럼 세 주인공들을 애매하게 연결하는 한 사고가 크리스티나의 가족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려도 신비는 더 깊어만 간다.
잭이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놓고 고민하고 폴이 무명의 심장기증자에게 진 빚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블러드 워크>와 동일한 전제- 이냐리투는 생명의 신비를 숙고한다. 우연한 사고일까 아니면 신의 계획일까? 수학자인 폴은 “낯선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 정말 많은 우연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크리스티나에게 희롱하듯 말한다(서로를 만나게 하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의 불명확한 철학적 결론은 강력한 배우들을 통해 믿을 거리가 되고 ‘21그램’이 사람이 죽을 때 몸이 잃는 질량이라는 걸 설명하는 숀 펜의 마지막 목소리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 가장 어려운 장면들을 연기하는 나오미 왓츠는 뛰어난 재치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이 영화에서 숀 펜이나 베니치오 델 토로처럼 전문적으로 질풍 같은 역을 맡는 배우들이 강력하게 제어되고 있는 반면 왓츠는 열정적인 흥분을 준다(이 세 사람 모두가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영화의 순간적인 논리들은 구조적이라기보다 연상적이다. 지성을 자극하는 최근작 <메멘토>나 <돌이킬 수 없는>보다는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나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소설 <팔방놀이>(Rayuela)의 이야기 전형에 더 가깝다. 한동안 억제하며 자비를 보여주는 이냐리투는 기대되는 폭력의 장면을 마지막까지 보류한다. 타블로이드식 악몽의 이미지들이 밀려오는 중요한 모텔 방에서의 소란을 총명하게 침묵 속에서 보여준다. 가슴 조이는 한 장면은 아무 일 없이 그냥 지나가버리고 또 다른 장면이 주워진다.
만약 영화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었다면 감정적인 굴곡이 덜했을 것이다. 정말로 그랬다면 영화의 뉴에이지 스타일 신비주의마저도 단지 감상에 머물렀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아가나? 우리는 몇번을 죽는 것일까?” 이것은 이냐리투라는 현명한 감독이, 영화란 매체가 반복되어 생산되어질 수 있으며 영원히 지속되는 시장성까지 아우른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21그램>도, 우리의 삶도, 서글픈 수수께끼이다.
(2003. 11. 9.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