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멜로 역에 도착한 청춘 아이콘,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정우성
2004-11-04
글 : 오정연
사진 : 이혜정

돌이켜보면 그의 눈물을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무기력한 헛웃음을 흘리거나, 반항기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응시했던 정우성이 눈물을 비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절망과 분노 끝에 절규할 때 정도 아니었을까. 그런데 늦가을의 스산함이 절정에 이르는 11월, 정우성이 “작정하고 선택한” 가슴아픈 사랑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우리를 찾아온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에 죽음을 앞둔 절박한 사랑도 모자라, 잊혀지고 잊어가는, 따지고보면 사랑의 가장 슬픈 순간까지 극복하는 절대적 사랑의 주인공 철수가 그가 맡은 역할이고, 정우성은 여태껏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속에서 울었던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이 운다. 이를 통해 그가 보여주는 것은,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려, 육체적 죽음보다 먼저 찾아오는 정신적 죽음을 선고받는 아내 수진(손예진)의 곁에 남는 남편의 극진한 헌신.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애써 눈물을 감추는 힘겨운 웃음으로, 혹은 비어져나오는 슬픔을 참지 못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흐느낌으로 커다란 스크린을 채우는 그의 존재감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영화다. 여자의 눈물이 상대로 하여금 몸둘 곳을 모르게 만드는 것이라면, 남자의 눈물은 상대방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며 마음 둘 바를 모르게 하는, 이른바 스펙터클임을, 관객은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정우성이 철수의 애틋함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소화하기 위해 택한 전략은, 자연스러움에 대한 결벽에 가까운 강박이었다. 선남선녀의 모습 자체가 관객에게 기쁨이 되는 멜로영화의 특성상, 자신의 CF 속 이미지를 차용하면서까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멋있게 나와야 한다’는 의식적인 목표가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정작 본인은 이를 완강하게 부인한다. “사실 이재한 감독은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고 속 정우성의 모든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었다. 하지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캐릭터가 어떤 상황 속에서 배어나오는 것이라면 모를까.” 카메라 앞에서 울어야 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저 수진을 사랑하는 철수의 감정이 되기 위해 둘만의 기억을 되짚었을 뿐이다. 심지어 영화 속에는 잠깐씩 스쳐지나갈 뿐인 철수의 직업, 목수와 건축가를 소화하기 위해 목공술과 제도법도 배웠다.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며 너스레를 떨지만, 정작 그의 진심은 “카메라 앞에서 가짜로 하고 있는 것이 들통날까봐 조마조마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데뷔 이후 꾸준히 찍어온 영화 열한편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어떤 식으로든 ‘전환’이라는 의미심장한 단어를 떠올릴 법한 시점에서 그가 멜로영화를 선택한 배경이 궁금했고, 다른 누군가였다면 정말 뻔한 결정으로 보였을 선택 이후, 그의 행보도 알고 싶었다. 늘 진심을 담아 최선을 다해왔기에 어느 작품 하나 후회는 없지만, 이제는 “대중이 나에게 원하는 이미지를 굳이 벗어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범위 안에서 끊임없이 깊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본다.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혹독하게 이어지는 홍보일정, 갑자기 서늘해진 날씨 탓에 계속해서 쿨럭거리던 그는 단 한번도 건성으로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관심을 표명하는 그 모습에서 매 순간 진심을 보이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정우성이 말하는 정우성에 대한 3가지

청춘의 아이콘이 선택한 멜로영화

예전부터 멜로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센 버전으로. 어릴 적 <천장지구>와 <열혈남아>에 열광하던 시절에도 나에게 그 영화들은 누아르가 아닌, 멜로영화였다. 그런 영화 속에서 남자주인공들은 한 여자와의 사랑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나. 나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멜로영화의 비극성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비극적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지 않나? 하다못해 가요를 보더라도 비극적인 가사를 가진 노래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것처럼. 사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내가 20대였다면 선뜻 할 수 없었던 영화다. 단순히 배우로서의 경력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경험이나 사고의 폭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하면서 느꼈던 문제는 또 다른 것이었다. 관객은 영화 속 철수와 정우성을 동일시하려 할 텐데, 어느 순간 내가 이런 완벽한 사랑의 주인공과 같은 사람으로 보여도 괜찮은 걸까 싶어졌던 거다. 20대 중반까지는 절대적 사랑의 존재도 믿었지만, 이젠 아니다.

중견배우 정우성

10년 동안 배우생활을 하면서 소중한 익명성을 잃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영화를 하는 동안은 매번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영화 작업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자유로운 것 같다. 요즘은 어느 곳에 가든지, 내가 선배임을 인식하게 된다. 현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분위기를 챙긴다고 실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재한 감독과는 평소에 시나리오 모니터링도 해줄 정도로 친하고, <내 머리 속의 지우개>도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많은 조언을 주고받았지만 현장에서는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신인감독의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한심한 중견배우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편집실에 가서 작업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편집실 근처에도 안 갔다. 그러다보니까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는데 자꾸만 딴 생각이 나더라. ‘저 장면은 포커스가 왜 저래?’, ‘이 장면은 들어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식이다. (웃음)

감독의 꿈

원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지만, 진지하게 영화감독을 고민한 것은 <비트> 때부터였다. 김성수 감독님은 원래, 항상 배우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의견을 반영하시곤 하는데, 내 의견이 그런 식으로 반영되는 것이 색다른 경험이었다. 자연스럽게 어떤 상황을 비주얼적으로 고민하는 버릇이 생겼고, 내가 생각보다 그런 것에 관심이나 재주가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물론 딱히 배우로서의 위치에 불만을 느낀다는 건 아니다. 감독을 하게 되더라도 배우는 계속할 거다. 미치지 않고서야 배우를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태껏 네편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는데, 언젠가 나를 인터뷰한 기자가, 뮤직비디오를 찍을 당시 스탭을 사전 취재까지 했더라. 그가 나를 “좋은 연출”이라고 말했다는 걸 듣고 기분이 좋았다. (웃음) 왜 그런 좋은 소문은 좀더 일찍 안 퍼지는지 몰라. (소리내어 웃음) 현재 감독 데뷔와 관련해서는 제법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있고, 막연한 꿈은 아니다. 데뷔작으로 청춘누아르를 찍고 싶다. 감독 겸 출연? 예전에는 엄두도 못 냈는데, 요즘에는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감독해서 욕먹고, 출연해서 욕먹는 걸 한번에 할 수 있으니 좋지 않을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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