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주홍글씨> 감독 변혁
2004-11-04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불륜을 쿨하게 넘기는 게 오히려 진부하다”

아시아 최초의 ‘도그마’ 인증 작품이기도 한 변혁 감독의 첫 장편 <인터뷰>(2000)는 국내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4년, 두 번째 장편 <주홍글씨>의 개봉을 이틀 앞두고 있는 변혁 감독을 만났다. 모든 감독이 그렇듯 관객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그는 “건방지게도, 반전 효과를 내는 데 너무 인색했던 것 같다”고 했다. 장르적 효과를 좀더 낼 수도 있었는데 처음부터 “우린 <텔미썸딩> 같은 스릴러, 그런 영화 아니라고 솔직하게 자수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촬영 때 스탭이 이건 어렵다고 말려도 그냥 밀어붙이다가도 자기 의사를 꺾는 결정적 한마디가 있었다며 소개한다. “감독님, 그건 전형적이에요.” 그러니까 변혁 감독은 자신의 작가적 욕망과 대중적 호소력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느라 여전히 긴장해 있었다. 그는 <주홍글씨>의 목표가 가해자인 듯하나 결국은 피해자이기도 한, 모든 캐릭터가 서로를 복제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저널의 반응이 모처럼 정반대로 갈린다.

칭찬은 모르겠고, 비판이 두 가지로 모아지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이것저것 너무 많이 끌어안고 있어서 부담스럽고 과잉이라는, 두 번째는 이야기 자체가 기분 나쁘다는 것. 알았어 그 정도 했으면 됐지, 뭐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거다. 화해하고 용서하고 살 만한 세상이라고 하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그런데 나는 (불륜을) 쿨하게 넘기는 트렌드 자체가 오히려 진부한 게 아닌가 싶다.

사적 영역의 불륜과 공적 영역의 살인 미스터리를 섞었고, 그것이 서로의 거울처럼 비추게 했다. 전작도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오갔는데, 두 가지 대립항의 교차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인터뷰> 때는 그런 형식적인 면에 경도된 측면이 있고, 이번에는 사람 자체에 대해 관심이 훨씬 많았다. 여전한 건 어떤 한 입장의 이야기만 듣기보다 모든 걸 관계 속에서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것이 전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또 한 가지는 어떤 특수한 개인의 문제로 드러나기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로 다가갔으면서 해서다.

그런데 전반부와 후반부, 혹은 기훈(한석규)의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의 느낌이 많이 다르다. 카메라 워크도 그렇고 일부러 연출을 다르게 한 이유는.

그렇게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연출 방식 자체를 달리한 게 잘한 선택인지 좀 회의가 들긴 한다. 영화 앞에서 시선을 끌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뒷부분이라는 전제 때문에 앞에선 가능한 빨리 답만 보여주면서 가려고 하다보니 풀숏없이, 마스터숏 없이 자연스럽게 컷 중심의 화면이 됐고 뒤는 카메라가 흘러가는 식이 됐다. 또 한 가지는 가능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려고 했다. 그래야 끝내는 같은 이야기이구나, 라는 효과가 더 성공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감독의 의도야 좋지만 잘 안 섞인다는 말도 있지만. (웃음) 한석규가 자신은 잘 나가는 경찰에, 장인은 금배지고, 정부 역시 잘 나가는 여자여서 사진관 살인사건을 그렇고 그런 치정극쯤으로 보지만 결국은 그게 자기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거다.

살인극에 휘말린 사진관 여인이 “사랑하면 (무슨 짓을 하든) 괜찮은 건가요?”라고 말한다. 사랑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요즘 세대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드라마틱한 게 없고 쉬워졌다. 쉽게 사랑하고 쉽게 결혼하니 이혼율이 50%를 넘는다. 그래서 정상적인 결혼을 하고도 운명적인 사랑을 하지 않은 듯한 결핍감이 있다. 그런 면에서 불륜쯤 돼야 옛날 식의 운명적인 사랑, 진한 희생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진다. 안 좋은 사랑의 모습이지만 거꾸로 이 시대의 유일한 사랑 같은 가치를 인정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가가 굉장히 세다. 근본적으로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치명적인 것이다.

영화도 그런데 그 두 가지 관점이 충돌해서인지 정리가 잘 안 된다. 치명적인 대가를 치르더라도 할 만한 사랑이라는 건지, 아닌지.

그것이야말로 어느 한손을 들어주기 힘든 문제다. 그런데 불륜에 대해 들키게 하면 나쁜 거고 그렇지 않으면 아닌 걸로 정리된 듯하다. 그리고 이 주제는 더이상 다루지 않아도 되는 듯 받아들인다. 마치 90년대 문화계에서 해체주의가 어떻고 구조주의가 어떻고 신나게 떠들었지만 막상 그 누구도 정확하게 책 한권 읽지 않은 채 10년 정도 이야기하고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 채 그냥 덮어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훈이 자동차 트렁크에서 끔찍한 경험을 한 뒤 마지막에 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좀 차분하기도 하고. 한석규는 이 끝부분에서 반미치광이처럼 가려고 했는데 감독이 말렸다고 했다. 어떤 생각이었나.

혹시 이 영화를 보고 트렁크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하던 불륜을 멈출 것 같지는 않다. 기훈마저도 다시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다. 굉장히 한심한 존재라는. 기훈의 마지막 태도에는 ‘이 정도했다고 정신차리고 다르게 살지는 않아’ 하는 게 있다.

살인사건에서 최후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가장 셌다고 느꼈고, 이 영화가 기존 불륜 영화와 다르다고 느꼈던 장면이기도 하다. 얼마나 어떤 강도로 찍을지 고심이 많았을 것 같은데.

정확하게 지금 보는 것의 2배의 강도로 찍었다. 시사 때 너무 센 거 아니냐고 해서 좀 줄였다. 그 정도로 인간이 끔찍할 수 있다는 걸 의도했던 것 같다. 또 사람이 잘 안 죽는다는 것도. (웃음) 연출하기 가장 힘든 장면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시나리오 쓸 때 어떤 느낌으로 갈지 이미지는 분명했다. 멀쩡한 날 오후 햇빛 쏟아지는 날, 퍼포먼스하듯이.

데뷔작이 예술영화쪽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상업영화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것도 흥행이 안 되고 나면 예술영화라고 하지 않겠나. (웃음) 일단 <인터뷰>는 그때 그렇게 하면 안 됐을 것이라는 게 나중에 든 생각이다. 이론적으로 더 치열한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었어야 옳다. 스타를 데리고 한국 영화계에 큰 죄를 지었다. (웃음)

그 정도였나.

이번 영화로 연출이라는 테크니션의 느낌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자본에 대한 도덕성을 크게 의식했다. <인터뷰> 때는 그런 게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영화 여정은.

기본적으로 주제가 정해지면 형식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여전히 미학적 관심은 있고, 그러려면 웰메이드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니 주류권 안에서 계속 해나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크기의 문제라기보다 배우의 문제가 있다. 사람, 그리고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보니 배우의 능력이 아주 중요하다. 훈련된 배우가 필요한데 결국 스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스타가 되어야 배우로서의 훈련이 가능한 게 우리의 현실이니까. 난 심한 작가는 아닌 거다.

혹시 박찬욱 감독의 경우가 참고가 됐나. 자기 스타일대로 데뷔해 잘 안 풀리다가 웰메이드 상업영화로 대박을 터뜨린 뒤 양쪽을 다 노릴 수 있게 됐는데.

박찬욱 감독의 경우는 굉장히 예외적이다. 두 가지를 다 병행할 수 있다는 건 일종의 환상 같다. <주홍글씨>가 나에게도, 제작자에게도 만족스러우면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미학적 취향이 대중적으로도 받아들여지면 다행이지만 차이가 있는데도 억지로 그걸 맞출 수가 있나.

프랑스에서 영화뿐 아니라 미학까지 오래 공부를 했는데, 그게 영화 만들기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솔직하게는 방해를 많이 줬다. 영화를 분석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만드는 데는 방해된다. 모든 것에서 논리와 근거를 생각하는 게 몸에 배어서. 창작은 좀 다른 건데. 좋게 말하면 미학적이지만 더 솔직하게 말하면 가슴은 없고 머리만 있는 식이다. 이번에 많이 걷어지지 않았을까 기대한다.

프랑스의 주된 경향이라는, 내면주의 혹은 내밀주의로 번역되는 앵티미즘의 영향은.

개인주의에서 좀더 내면으로 들어가는 경향인데, 주로 신인감독들에게 해당된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듯한 색깔의 영화다. 이들의 영화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닌지, 너무 산업화된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단의 경우도 그곳은 어설픈 시도라도 다음을 기대해보겠다며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있다. 어느 한 가지가 좋으면 다른 것들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그걸 밀어준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환경은 신인감독들이 자기 색깔을 드러내기가 참 어렵다. 이제 겨우 철자법을 뗐는데 당장 멋진 시를 써내라는 식이다. 그러니 자기 영화를 만들기 전에 누구 풍의 영화를 흉내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장진, 류승완 감독은 굉장히 주목하고 밀어줘야 할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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