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섬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연쇄살인극
“다 뒤로 물러나라니까!” 어디서 떨어진 불호령인가. ‘보이지 않는’ 제작진의 엄포는 위협적이다. 여수 외포마을에 지어진 <혈의 누> 오픈세트. 바깥에서 주뼛거리던 취재진이 주춤주춤 물러선다. 그제야 제지소 세트가 한눈에 들어온다. 3m가 넘어 보이는 기다란 나무쪽으로 촘촘하게 두른 탓에 바깥에서 제지소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밭을 갈아엎어 만들었다는 제지소 안에선 바깥의 미세한 거동까지 감시할 수 있다. <혈의 누> 촬영현장 방문은 예정된 것이었지만, 제작진의 레이더에 걸린 불청객들은 극중 비밀을 품고 있는 제지소 세트에 들어서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혈의 누>는 ‘조선시대 추리공포극’이라는 독특한 인장을 내세운 영화다. 19세기 초, 조공품을 실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원규(차승원) 일행은 동화도를 찾지만,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피비린내나는 욕망의 지옥도’와 마주한다는 이야기. 시나리오를 쓴 김성제 프로듀서는 베일에 싸인 줄거리를 따져묻자 “서양문물에 밝은 원규는 뭍의 논리로 사건을 해결하려 하지만 결국엔 뒤통수를 맞게 되는 지배계급”이라고만 귀띔한다. 이날 촬영은 제지소에서 처참한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초지공들이 과거 천주교도로 몰려 죽은 강객주의 원혼이 노해서라며 일하길 거부하는 장면부터 시작됐다. 초지공 역할을 맡은 단역배우가 연달아 대사를 까먹자, 차승원은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다들 왜 이러실까” 하는 너털웃음으로 다소 썰렁해진 현장 분위기를 전환한다.
“목소리에 힘을 더 빼라고. 그래야 더 약올리는 것처럼 들릴 것 같은데.” 연출을 맡은 김대승 감독은 리허설을 중요시하는 스타일. 테이크는 많이 가지 않는 편이지만 슛에 들어가기 전까지 배우들을 수십번 독촉한다. 특히 초지공들에게 매를 가하려는 조달령(박철민)을 원규가 꾸짖자, 섬의 실질적인 주인인 인권(박용우)이 나서 자신이 시킨 일이라며 동요치 말고 매질을 계속하라고 하는 이날 촬영은 극중 원규와 인권의 대립이 점화하는 중요한 장면이라 김 감독은 배우들의 동선과 시선은 물론이고, 대사 타이밍까지 원하는 느낌을 얻어내기 위해 한 시간 넘게 반복을 요구한다. 7부 능선을 넘어서일까. 짜증이 일 법도 한데 <혈의 누>의 배우들은 꼼꼼하기 그지없는 김 감독의 스타일을 체화한 듯한 표정들이다. “원규가 햄릿이라면 인권은 배트맨이에요”라는 게 캐릭터에 대한 김 감독의 덧말.
“김영하의 소설 <아랑은 왜>를 읽고서 <장미의 이름> <영원한 제국>처럼 과거를 배경으로 하되 현대적인 캐릭터와 설정을 등장시킨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좋은영화 김미희 대표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혈의 누>는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올라간 미스터리 살인극으로만 규정되진 않을 듯하다. 귀동냥만으론 충분하진 않지만, 제작진은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만을 궁금해한다면 영화의 재미가 반감된다고 말한다. 왜 굳이 19세기 초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택했는지, 극중 원규와 인권의 대립이 무엇을 말하는지 등의 호기심이야말로 <혈의 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열쇠인 듯하다. 6월28일, 빗장을 걸고서 촬영을 시작한 <혈의 누>는 내년 2월 개봉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