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창백하고, 조금 더 어두운 그녀를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지난 10월25일, 맨해튼의 한 호텔방에서 <포가튼>(The forgotten)을 위한 줄리언 무어와의 인터뷰를 기다리면서도 내내, 습자지같이 창백한 얼굴에 웃는지 우는지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불안한 새처럼 하이톤의 음색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를 상상했다. 그러나 문밖에서 먼저 들려오던 여자의 목소리는 상상과는 달랐다. 똑 떨어지는 뉴욕 악센트로 부산스럽게 영화사 스탭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는 훨씬 힘차고 안정적이고 건강하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키에, 생각보다 왜소한 체격을 가졌고, 생각 이상으로 미인이었다. 영화로 접하며 느낀 ‘멋지다’는 느낌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여자. 스크린 속에서 유난히 각져 보였던 턱의 앵글이 늦가을 햇빛 아래 부드럽게 커브를 그리는 동안, 줄리언 무어와의 짧은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포가튼>은 스릴러의 장르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가져오긴 하지만 그 스릴러를 이끄는 힘은 긴박한 사건이 아니라, 누구도 해독하지 못할 ‘모성’이라는 강인한 감정입니다. 최근작인 <파 프롬 헤븐>이나 <디 아워스>는 말할 것도 없고, <부기 나이트>에서 포르노 배우로 등장했을 때조차 당신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는데요. ‘모성애의 상징’처럼 느껴질 만큼 말이죠. 특별히 이런 역할들에 끌리고, 그런 영화를 선택하는 이유가 있나요.음… 일단 ‘모성애의 상징’이라, 으으으… 그런 거창한 말은 별론데요. 제가 그런 영화를 일부러 찾는다기보다는 우리의 삶에서 남녀 관계만큼 빈번하게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자식과 부모간이기 때문일 거예요. 잘 보면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거든요. 모성을 거창하게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보다는 훨씬 생활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것이 <포가튼>에서 가장 기대했던 바이기도 해요. 내가 부모로서의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부모가 돼본 적이 한번도 없다 해도, 우리 모두는 한번은 누군가의 자식들이었잖아요. 그것이 SF건 스릴러건 모두들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사실 난 FBI였던 적도 없고, 영국 사람도 아니고, 19세기에 살아본 적도 없지만 그런 역할을 쭉 연기해왔잖아요. 기본적인 감정이 공유된 이후엔 모두 상상력에 달린 문제죠.
지난 9월24일 미국 개봉한 <포가튼>은 총 6400만(6454만1093)달러를 벌어들이면서 나쁘지 않은 흥행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흥미로운 도입부에 비해 의외의 결말로 이어지는 이 영화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포가튼>은 좋은 영화가 아니다. 그들이 제공한 믿음직한 희생자는 바로 줄리언 무어”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다. 사실 <포가튼>은 줄리언 무어에 모든 것을 기대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 줄리언 무어를 캐스팅한 것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자, 유일한 미덕일 수도 있을 정도로.
<포가튼>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은데요.7천만달러를 벌어들이면서 어떻게 평론가들만 좋아하는 영화를 찍을 수 있겠어요. 사실 신문의 영화리뷰들은 너무 잔인해서 보기가 힘들 정도예요. 마치 뭔가 잘못된 점을 꼬집어야지 자신들이 위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죠. 가끔 한 사람의 의견이 어떤 영화에 대한 전체의 평가로 둔갑하기도 하잖아요. 그건 너무 가혹해요. <포가튼>은 우리가 아이들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폭력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에 은유를 담고 있는 영화예요. 분명히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을 거고, 정서적인 울림을 경험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만약 소규모 예산의 독립영화를 찍는다면 뭔가 다른 영화가 될 수 있었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 영화를 만든다면 그건 엄연히 비즈니스예요. 영화란 것이 말하고자 하는 특정한 요소를 제외하고는 엔터테인먼트죠. 그 이상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그 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 누가 무슨 질문을, 어떤 각도로 던지든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는 자세로 대답을 척척 해낸다. 게다가 혹 짓궂거나, 공격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웃음으로 무마하며 피해가거나,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혹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는 게 몸에 밴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프랑크푸르트로 알래스카로, 전세계 23개국을 돌아다니며 자랐던 남달랐던 성장과정에서 익힌 삶의 방식이자 서른을 훨씬 넘긴 나이에 자신의 필드에서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한 한 인내심 많은 배우의 삶의 자세인 듯했다.
당신은 그동안 꽤 다양한 장르와 감독을 오고간 것 같은데요. 독립영화의 뮤즈인 듯 느껴지다가도, 심심찮게 블록버스터에도 출연하고, 가벼운 코미디와 무거운 작가영화까지 작품 선택에서 그다지 높은 문턱을 두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건 뭔가요.첫째도, 둘째도, 시나리오예요. 어떤 장르인지, 감독이 유명한 사람인지, 전에 뭘 찍었는지 따위는 상관하진 않아요. 사실 폴(폴 토머스 앤더슨)이나 토드(토드 헤인즈)와 작업을 시작할 당시, 두 사람 모두 너무나도 어리고 보장된 것 없는 감독들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뭘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이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예요. 그런 감독이 그런 확신에 찬 시나리오를 전해준다면야 그들이 누구든 간에, 규모가 어떻든 간에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봐요.
폴 토머스 앤더슨이나 토드 헤인즈와 다시 작업할 계획은 없나요.일단 현재는 남편(바트 프로운트리히)이 연출하는 영화 <트러스트 더 맨>(Trust the Man)을 데이비드 듀코브니와 함께 찍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토드는 밥 딜런에 대한 영화를 준비 중이고, 폴이 찍으려는 영화도 남자영화라고 하더라고요. 불행히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 같죠? (웃음)
혹시 두 사람 모두, 당신이 다른 남자감독과 결혼한 상실감에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닐까요.아하하하하! 이런 이런! (웃음)
<포가튼>은 어떤 스릴러?
‘지워진’ 아이를 되찾으려는 엄마의 투쟁아이가 있었다. 그녀에겐 여덟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14개월 전에 비행기 사고로 잃긴 했지만 분명히 그는,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은 아이를 가진 적이 없어. 그건 상상의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라고. 아이의 사진이 사라지고, 비디오에 담긴 추억이 사라지고, 남편도, 의사도, 이웃들도, 심지어 <뉴욕타임스>도 아들이 한때 존재했음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이 손에 잡힐 듯한 기억은 뭐지? 이 엄마, 텔리(줄리언 무어)는 정말 정신이상인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제외한 세상 모두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는 이렇게 흥미롭게 출발한다. 그리고 ‘지워진’ 아이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가진 엄마는, 세상과 알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외롭고 긴 투쟁을 시작한다.
스릴러와 모성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포가튼>에 긴장감을 더하는 존재는, 배우를 제외한다면, 단연코 로케이션일 것이다. 원래 시나리오에서 보스턴으로 설정되었던 배경은 촬영에 앞서 감독인 조셉 루벤과 주연배우인 줄리언 무어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영화는 한적하고 고풍스러운 보스턴의 안락함보다는 뉴욕의 을씨년스럽고, 스산한 분위기를 가져왔다. 특히 브루클린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비롯해, 어두운 강 근처 갈대밭, 차가운 맨해튼의 월스트리트의 풍경 등은 영화의 숨은 캐릭터로서 소임을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