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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중국인을 그린 <2046>
2004-11-11
글 :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이제 귀향은 공포다. 중국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향이지만, 중국은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강권한다. 어제의 홍콩인에게, 오늘의 대만인에게 중국 반환은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공포다. 결국 그들이 머물 곳은 길이고, 길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들의 이상향은 멈춰선 낙원이 아니라, 끝없이 달리는 ‘열차 2046’이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영원히 기억을 잃지 않는 시간의 궤도를 탈주한 열차다.

그들은 ‘오리엔탈’(동양)에 산다. 동양에는 어디든 오리엔탈 호텔이 있고, 오리엔탈 호텔은 어디든 그들의 집이 된다. 그들은 기근이 들면 떠나고, 왕이 명하면 이주하고,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 도망갔다. 그들은 중국 본토가 아닌 곳에 사는 중국인, ‘오버시즈 차이니즈’(Overseas Chinese)다. 왕가위 영화 <2046>의 주인공들도 ‘Oriental’ 호텔에 산다.

<2046>의 배경도 ‘오리엔탈’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는 홍콩과 싱가포르지만 중국, 일본, 캄보디아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차우(양조위)가 <화양연화>의 상처를 안고 떠났던 싱가포르에서 홍콩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2046>은 시작된다. 그는 잠시 캄보디아의 프놈펜에도 머물렀다. 콜걸인 바이링(장쯔이)은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로 가려고 한다. <화양연화>에도 등장했던 이름인 수리첸(공리)은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싱가포르로 날아왔다. 차우가 사랑하게 되는 ‘Oriental’ 호텔주인 딸 왕징웬(왕페이)은 애인을 찾아 홍콩에서 일본으로 떠난다. 심지어 호텔주인조차 젊은 시절 하얼빈에서 테너였다고 말한다. 북위 40도가 넘는 하얼빈에서 적도 부근의 싱가포르까지, 영화의 배경은 이토록 드넓다. 중국인의 대륙적 기질이 아니고는, 쪽수로 밀어붙인 디아스포라(유랑)가 아니고는, 상상하기 힘든 광대함이다.

부유하는 중국인의 정체성을 그리다

가끔 싱가포르를 생각하면 전율을 느낀다. 적도 부근에 중국인들이 세운 나라가 있다니. 극동아시아의 구석, 한반도에 ‘갇혀’ 살아온 한국인에게 ‘트로피카’는 너무나 이국적인 공간이다. 과거에는 상상의 공간이었고, 최근에는 여행지일 따름이다. 그곳에서의 정주란 꿈조차 꾸기 힘들다. 그런 머나먼 곳에 우리와 비슷한 노란 피부의 중국인들이 터 잡고 살다니. 무섭고, 부럽다. 활동범위가 넓으니 상상력도 광활할밖에. 왕가위의 전작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사랑의 비밀을 봉인하는 장소는 동네 뒷산의 나무가 아니고, 경복궁의 기둥도 아니고, 석굴암의 석벽도 아니고, 머나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석벽이다. 한국영화라면, 뜬금없는 설정이다.

최근 동남아를 여행하다 뜻밖에 오버시즈 차이니즈 패티시가 생긴 나의 눈에 <2046>은 부유하는 중국인들의 정체성에 관한 영화로 읽혔다. 차우의 몸과 마음을 농락하는 여인들의 캐릭터는 중국 밖 중국을 닮았다. 수리첸의 직업인 프로 도박사는 중계무역과 금융업으로 먹고사는 싱가포르를 은유한다. 정작 사랑하는 이에게는 버림받고 이놈 저놈을 전전하는 바이링은 중국에서 떨어져나와 제국주의 열강에 휘둘렸던 홍콩의 운명을 닮았다. 차이니즈에 콩깍지가 씌인 나의 시선은 그렇게 봐버렸다.

그렇게 보니 바이링이 홍콩을 떠나는 것은 중국 반환을 맞아 벌어진 홍콩인들의 이주사태를 연상케 했다. 바이링은 ‘추운’ 홍콩을 떠나 ‘따뜻한’ 싱가포르로 가려고 한다. 바이링은 차우에게 “그곳은 따뜻한가”라고 묻는다. 싱가포르에 살다온 차우는 “일년 내내 기온이 변함없다”고 답한다. 나는 기온을 환경으로 읽는다. 바이링은 중국 반환으로 변화무쌍한, 불안한 정치환경에 놓인 홍콩을 떠나 ‘하나의 중국’ 정책에서 비켜나 있어 언제나 변함없는, 안온한 싱가포르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고보니 중국 정부의 ‘하나의 중국’ 정책에서 비켜나 있는 싱가포르는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괴물에 ‘먹힐’ 것을 두려워하는 홍콩인, 대만인에게 살고 싶은 곳일 수도 있겠다.

<2046>은 떠도는 중국인들의 영화다. 떠도는 자에게 “사랑한다”의 동의어는 “함께 떠나자”다. “함께 살자”가 아니다. 차우는 수리첸에게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차우의 분신인 2046 열차의 ‘나’(기무라 다쿠야)도 안드로이드(왕페이)에게 “함께 떠나자”고 애원한다. 안드로이드의 현실 캐릭터인 왕징웬은 일본어로 “저를 데려가 주세요”라고 되뇐다. 그의 일본인 애인에게 닿지 못하는 곳에서. <2046>의 등장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떠나자”고 애원하지만, 누구도 함께 떠나지는 못한다.그들은 결코 ‘해피 투게더’하지 못한다. 하지만 떠남은 그들의 숙명이다.

그들은 함께 떠나지 못할 것을 알면서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그래서 더욱 서글프다. “함께 떠나자”는 속절없는 애원에는 언제나 떠나야 했지만, 더이상 떠나기를 지긋지긋해하는 자의 회한이 묻어 있다. 그들의 노곤한 몸도 허무한 마음도 정주를 갈망한다. 하지만 노마드(유목민)에게 상실은 오래된 습관이다. 그들은 디아스포라에 지쳤지만, 디아스포라에 길들여져 있다. 누군들 지독한 상실의 기억이 없으랴. 정주민들은 상실을 겪으면 “눈물을 부르는 추억”을 안고 일상으로 숨어버리지만, 유목민들은 더 아득한 곳으로 떠난다. 그들에게 상실은 일상이다. 상실은 허기를 부르고, 허기는 방황을 낳는다. 마음이 허하면 몸이 혹사당한다. 차우는 먹고, 마시고, 떠들고, 섹스하면서 인생을 탕진한다.

하지만 상실의 습관은 또 다른 상실을 부른다. 차우는 수리첸을 잃은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해 왕징웬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손조차 내밀지 못한다.

떠남이 오래되면 고향을 잃게 마련이다. 고향을 잃은 자는 이상향을 갈망한다. 삶이 정처없으니 더욱 지독한 이상향을 꿈꾼다. 그들의 고향, 사회주의 중국은 오히려 공포의 그림자다. 중국 반환 전의 홍콩인들에게 그랬고, 지금의 대만인들에게 그렇다. <2046>에서도 어김없이 중국은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중국은 어느 날 불쑥 일상을 덮칠지 모르는 위험한 그늘이다. 1960년대의 문화혁명은 중국이라는 공포의 상징이다. 중국 공산화가 그들의 몸을 고향에서 떠나게 했다면, 문화혁명은 그들의 마음을 고향에서 떠나게 했다. 문화혁명은 중국인은 물론 홍콩인에게도, 대만인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자꾸 되살아난다. <2046>에서도 어김없이 문화혁명은 느닷없는 공포로 끼어든다. 60년대 홍콩의 ‘화양연화’와 중국의 아비규환이 대비된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공포의 고향 - 중국

이제 귀향은 공포다. 중국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향이지만, 중국은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강권한다. 어제의 홍콩인에게, 오늘의 대만인에게 중국 반환은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공포다. 중국이 강성대국이 될수록 그들의 불안은 커져간다. 결국 그들이 머물 곳은 길이고, 마침내 길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들의 이상향은 멈춰선 낙원이 아니라, 끝없이 달리는 ‘열차 2046’이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영원히 기억을 잃지 않는 시간의 궤도를 탈주한 열차다. 하지만 상실의 습관을 지닌 자는 이상향을 의심하고, 상처받고 또다시 떠나려 한다. 지독한 상실의 습관은 그들의 유전자에 박힌 지문이다. 그들의 디아스포라가 쓸쓸하고, 애처롭다가 마침내 부럽다.

추신. 중화주의를 설파하느라 여념이 없는 ‘중국 국민감독’ 장이모에 비해서 ‘홍콩 감독’ 왕가위의 낭만적 사랑 중독증은 얼마나 다행인가. 정처없이 떠도는 인생은 참 쓸쓸하지만, 자리잡고 텃세부리는 삶보다 덜 위험하다. ‘천하’를 위해서 희생될 수밖에 없는 존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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