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시간은 유한하고, 뒤로 흐른다, <비포 선셋> <21그램> 속의 시간의 예술
2004-11-11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리처드 링클레이터(44)는 90년대 이후 미국 인디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링클레이터가 인디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까지 대접을 받는 데는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져 있는 평론가인 조너선 로젠봄의 입김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항상 대안적인 영화형식에 큰 관심을 보였던 로젠봄은 <비포 선라이즈> 이후 링클레이터가 발표하는 영화마다 대단한 호평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디 앨런의 <돈을 갖고 튀어라>를 연상케 하는 <뉴튼 보이즈>(1998), 애니메이션 <웨이킹 라이프>(Waking Life, 2001), 그리고 밴드에서 쫓겨난 로커가 학교 아이들로 다시 록밴드를 만드는 <스쿨 오브 락>(2003)까지 발표하는 영화마다 로젠봄은 자신이 (아마도) 가장 평가하는 감독인 키아로스타미와 동열에서 링클레이터를 언급했다. 어떤 사람이든 선뜻 동의하기 힘든 지극히 개인적인 미학적 취미가 있듯, 로젠봄의 링클레이터 평가는 약간 도를 지나쳐 보이지만, 감독의 존재를 알리는 데는 분명히 큰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비포 선셋>(위 오른쪽)으로 우리에겐 다시 링클레이터의 영화가 소개됐다. <비포 선셋>은 이미 보도를 통해 많이 알려진 대로, 속편이 원작을 능가했다는 대단한 호평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전편이 약 24시간 동안 벌어진 두 ‘현실적’인 젊은이들 사이의 로맨스였다면, 이번에는 감성에 휘청되는 30대 남녀의 로맨스다. <비포 선라이즈>에선 보기에는 감성적일 것 같은 젊은이들이 사실은 더욱 현실적으로 자신들을 통제하는 이성의 신봉자들이었고, 반면에 <비포 선셋>에선 더욱 현실적인 것 같은 성숙한(?) 30대 남녀는 대책없이 감정대로 행동하는 로맨티스트들이다. 링클레이터의 주요 극영화들은 대체로 하루 동안의 사건을 다룬다. 하루라는 시간은 링클레이터 영화의 상징이자 클리셰다. 다시 말해 그의 영화들의 극적 시간은 <비포 선라이즈>처럼 하루 이내로 한정돼 있다. 그런데 <비포 선셋>에선 한발 더 나아간다. 바로 극적시간(Real Time)과 상영시간(Running Time)이 같도록 드라마가 구성돼 있는 것이다.

극적시간과 상영시간이 같은 서스펜스 멜로 <비포 선셋>

소설가 제시(에단 호크)는 자신의 새 소설 홍보차 파리에 왔는데, 여기서 9년 전 헤어졌던 셀린느(줄리 델피)를 우연히 만난다. 이미 뉴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예약돼 있고 남은 시간은 약 80분이다. 그 80분 동안 두 남녀는 9년 만의 해포를 풀고, 우리는 그 시간만큼 상영되는 80분짜리 영화 <비포 선셋>을 보는 것이다.

영화의 서스펜스는 바로 이 극적시간과 상영시간이 일치한다는 데서 나온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제시가 곧 공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제시 앞에는 9년 전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놓쳐버렸던, 평생 잊지 못할 여성이 서 있다. 그런데 그가 가진 시간은 겨우 80분이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의 손에도 땀이 흐르게 마련이다.

자, 제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제시는 그녀와 걸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왜 그녀가 약속했던 장소에 나오지 않았는지는 알아야 그 다음을 진행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상대방은 다 잊었는데 혼자 좋아하고 있다면 이 무슨 추태인가? 두 사람이 롱테이크 속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쉼없이 떠들어될 때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우디 앨런(특히 <애니 홀>) 혹은 에릭 로메르의 수다스런 영화들을 떠올린다. 경쾌한 리듬은 우디 앨런 같고, 아이러니를 구사하는 지적인 대화는 로메르 같다.

제시의 머리 속에는 시계 바늘이 계속 돌아가고, 그를 공항까지 데려가야 하는 리무진 운전수는 무슨 죽음의 사자처럼 극의 중간중간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상징적이게도 어두운 색 옷을 입은 그 운전사는 제시만 재촉하는 게 아니다. 바로 우리가 그를 볼 때마다 시간이 얼마 없어 가슴이 탄다. 아! 저 사람 왜 자꾸 나타나지? 제발 제시를 그냥 놔둬, 라고 말하고 싶어질 정도다. 어두운 옷을 입은 무표정한 그 사람과는 함께 가선 안 될 것 같다. 제시는 운전사와 여자, 혹은 리무진과 진바지 입은 여자, 그 중간에 놓여 있다.

감독은 두 배우의 실제 상황을 극중 인물에 겹쳐놓아, 현실과 픽션 사이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놓기도 했다. 제시 역의 호크는 실제로 소설을 쓰는 배우이고, 셀린느가 물었듯 텍사스 출신이며, 얼마 전 아내인 배우 우마 서먼과 이혼하여 제시처럼 결혼생활로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 반면 셀린느 역의 줄리 델피는 파리 출신이고, 셀린느처럼 기타치고 노래 부르며, 또 연기공부를 위해 실제로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3년간 거주한 적이 있다. 배우들의 실제 경험이 극중 인물들의 현재조건을 구성한 것이다.

두 남녀는 현명했던 젊은 시절처럼 다시 이성을 되찾을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는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사랑에 모험을 해볼 용기를 내볼 것인지로 드라마는 초점을 맞춰간다. 이들은 80분 안에 그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애간장도 더불어 탄다. 감독은 이처럼 시간을 이용하여 멜로드라마를 그 어떤 서스펜스 스릴러보다 더욱 땀나는 영화로 만들어놓았다.

깨어나 일어나보니 스타가 된 감독 이냐리투

링클레이터가 차곡차곡 자기 경력을 쌓은 인물이라면, 멕시코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41)는 혜성처럼 나타난 감독이다. 37살 때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2000)를 만들기 전 그는 멕시코의 평범한 광고영화 감독이었는데, 데뷔작 하나로 일약 스타감독이 된다. 그해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단연 돋보이는 평가를 받아, 단숨에 유럽 화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이냐리투는 2001년 그 영화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라 미대륙에서도 주목받는 신인으로 소개됐다. 한마디로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된 감독이 이냐리투이다.

<아모레스 페로스>는 3개의 다른 에피소드가 결말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구조, 뒤집어진 시간 순서, 강렬한 색채와 힘있는 장면 등으로 미국에선 종종 타란티노의 작품들과 비교됐다. 이냐리투가 물건임을 먼저 알아본 이는 영국의 켄 로치로, 그는 뉴욕 테러 이후의 상황을 다룬 옴니버스영화 (11’09’01’ September 11, 2002)을 만들 때 멕시코 감독으로 이냐리투를 추천했다. 11명의 감독들이 모여 11일에 일어났던 사건을 각각 11분짜리로 만든 이 옴니버스영화에서 장편이라곤 딱 한편 만든 이냐리투가 켄 로치, 이마무라, 를로슈 등의 거장들과 함께 감독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올린 것이다.

이미 데뷔작에서 시간 순서를 일부러 깨고, 그럼으로써 극적 서스펜스를 솜씨있게 만들어냈던 이냐리투는 두 번째 장편 (왼쪽 사진)으로 그 복잡성의 최고치에 도전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도 <아모레스 페레스>처럼 세개의 에피소드가 교통사고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모두 연결된다. 심장이식을 받지 못하면 죽는 처지에 놓인 남자, 사고로 한순간에 단란한 가정을 잃은 여자, 신앙의 힘으로 회개했지만 사고로 또다시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분노하는 남자, 이 세 사람의 다른 운명이 서로 엇물린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 구조가 시간순서대로 진행되어도 따라가기 어려울 텐데, 이 영화는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원인이 있은 뒤 결과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결과를 먼저 보고 원인을 나중에 알게 되는 식이다.

우리는 불행한 조건에 놓여 있는 주인공들의 고통을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먼저 봐야 한다. 도대체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됐을까? 그런 강렬한 의문의 순간이 와도 영화의 시간은 원인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속 시원한 플래시백이 이 영화에는 없다. 역순의 시간도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암시를 주는 정도로 그친다. 관객은 계속해서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는데, 이런 장치의 효과는 물론 극적 긴장의 증폭이다.

역순의 시간, 극적 긴장의 증폭

시간이 뒤로 진행되는 아이디어는 최근에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스릴러 <메멘토>(2000)에서 보여준 바 있다. 이냐리투의 이 다른 점은 역순의 시간 개념을 이용하여, 스릴러에 그치는 지적 유희의 영화가 아니라 보편적인 고통을 전달하는 드라마를 만들어낸 데 있다. 원인보다는 결과가 먼저 보였듯, 시간을 역행시킴으로써 영화는 사건이 일어난 뒤, 다시 말해 ‘그날 이후’ 고통에 빠져 있는 세 사람의 비극적인 존재조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9년 만에 다시 만난 남녀가 합칠 것인가 아니면 각자 제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같은 아주 상투적인 이야기를 ‘시간’을 이용하여 세련된 서스펜스 멜로드라마로 만든 링클레이터, ‘시간’을 역방향으로 돌려 드라마의 극적 긴장을 더욱 증폭시키고 동시에 주제를 효과적으로 강조한 이냐리투, 두 사람 모두 ‘시간의 예술’로서의 영화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동화책 속의 이야기처럼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상업영화들의 단순한 시간 개념은 이런 식으로 신예들의 새로운 미학에 의해 자꾸 도전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시간 개념은 어떤 수준에까지 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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