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위풍당당 그녀, <여선생 여제자>의 염정아
2004-11-11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연기가 좋다, 나쁘다, 성장했다, 식상하다고 영화기자는 일삼아 쓴다. 그러나 어떤 연기가 훌륭한 연기일까? 체조처럼 기술 점수, 예술 점수 합산하는 채점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별수없이 관찰로 터득한 원리 하나. 극중 인물이 된 자신을 뻔뻔하게 믿어버리는, 스스로에게 홀딱 속아 넘어가는 배우의 연기가 관객도 속인다. 잘한다는 남의 연기와 얼마나 비슷한지 곁눈질하는 배우는, 아무리 열연해도 본인의 의심을 관객에게 전염시킨다. 요컨대 칭찬과 자아도취는 배우의 양식(糧食)이다. 밥이고 마약이다. <장화, 홍련>의 성공 뒤 16개월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염정아는 <범죄의 재구성>과 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를 통해 이 가설을 누구보다 보란 듯이 증명해 보였다. 그런 그녀가 지금 눈앞에서 깔깔 웃고 있다. 대사보다 지문이 중요한 캐릭터 <여선생 vs 여제자>의 철부지 교사 여미옥을 막 연기한 탓인지 염정아의 화법은 대단히 역동적이다. 손톱을 물어뜯을 것 같았던 <장화, 홍련> 때의 인터뷰와 딴판이다.

“저 단순하거든요. 잘한다, 보기 좋다고 칭찬해주면 더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에요. 걱정이 없어지니까 자연스러워지고. 캐릭터도 많이 타죠. <장화, 홍련> 할 때는 평소에도 과민했는데, <범죄의 재구성>의 서인경과 <사랑한다 말해줘>의 조이나 역 할 때는, 내가 나 스스로 모든 게 너무 섹시한 거야! 그러다 또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여선생 vs 여제자> 홍보 사진을 가리키며) 말을 막 하게 되더라고요. 이번 인터뷰 보면 잘난 척 엄청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건 있어요. 만약 여러분이 저를 연기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하셨다면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연기를 못하겠어요? 교만은 나쁘지만 그런 자신감은 필요해요. (…) 그런데 정말 끝날 때까지 이것(밤과자)밖에 못 먹어요? 아우, 난 배고프면 세상 다 꼴보기 싫고 손이 막 떨려. 하지만 단 건 싫어요. 매운맛, 짠맛이 좋아. 그러니까 내가 달콤한 애는 아닌가봐, 응?”

염정아는 기름기 있는 음식도 안 맞는다고 했다. 당연하지 싶다. 염정아의 연기는 피와 뼈, 그리고 그들을 간신히 감싼 얇은 피부를 연상시킨다. 거기에는 망설임이나 여운 따위의 기름기가 붙을 데가 없다. 서인경이, 조이나가 여미옥이 돈과 남자를 갖고 싶어 안달복달할 때, 염정아의 깡마른 몸은 감정과 하나가 되어 파르르 떨린다. 염정아는 독특한 의미의 육체파 배우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셔츠만 걸친 채 흐느적거리는 그녀는 <투 다이 포>의 니콜 키드먼이 부럽지 않고, 한 신용카드 CF에서 그녀가 “A, B와 무슨 관계야?”라고 추궁할 때면 가파른 목줄기가 말보다 먼저 연기를 한다.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웃음) 모두들 제게 다른 예쁜 여배우들과 다른 모습을 원한다고 말해요. 카드 CF라면 멋진 남자, 여자가 나와 정말 좋은 사람들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러잖아요. 근데 저는 살벌한 느낌으로 갔죠. 화장품 CF도 머리 틀어올리고 우아하게 미소짓겠구나 싶었는데 머리칼도 마구 헝클어뜨리고 실컷 웃었어요. 내게 아웃사이더의 느낌이 있대요. 그런 처절함이 언제 생겼을까…. 예전에는, 글쎄요 아웃사이더도 인사이더도 아니고 그냥 애매했죠. 그냥 애였는데 배우라 그런지, 살면서 겪은 경험을 언젠가 꼭 연기에 써먹으리라 몸에 새겨뒀나봐요. 아무 힘든 일 없이 지냈다면 지금 목소리에서도 눈에서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연기자가 됐을 것 같아요.”

<여선생 vs 여제자>에서 염정아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여자 여미옥을 연기하느라 근접 숏에서는 안면근육이 분주하고 긴 팔다리는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까불거린다. 남들이 가죽이나 도포 입고 하는 와이어 액션도 체육복 입고 뜀틀하면서 처음 경험했다. 고무공처럼 튀는 품새와 총천연색 표정을 보고 있자면 저걸 못해서 여태 어떻게 참았을까 싶다. 다만 염정아의 슬랩스틱에는 가시가 있다. 그저 한바탕 웃기기 위한 히스테리 연기에서도 어느 틈에 비어져 나오는 그녀 특유의 간절함이 목에 턱 걸린다. 어쨌거나, 단단히 작심한 연기 매너가 말해주듯 <여선생 vs 여제자>는 커리어의 전환점을 지난 염정아에게 목적 선명한 카드다. 첫째, 차고 독한 이미지를 잠깐 벗고 대중에게 친근해질 것. 둘째, 처음 시도하는 본인의 ‘원 톱’(주연 1명의 극적 비중과 인지도가 압도적인 영화) 영화로 흥행에 성공할 것.

“여미옥이 하는 동작들이 전부 제가 일상생활에서 늘 하는 손짓 발짓이에요. 그것들을 처음 연기에 이용해본 거죠. 저와 가까운 사람들은 전부터 코미디를 권했어요. 여미옥이 집에서 추는 춤도 옛날에 제가 집에서 프랑스 꼬마 가수 조르디 흉내냈던 거예요. (혀 짧은 소리로) 울랄라라 하는 거 있잖아요? 십몇년간 연습한 걸 처음 썼죠. 보여줄 게 너무 많다니까요. 후우, 안타까워 죽겠어요.”

스케줄로 빼곡한 매니저의 수첩을 슬쩍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데, 정작 염정아는 놀고 싶은 생각이 도통 없다고 말한다. 휴식은 무료하고 여행은 낯선 방에서 자는 게 불편해서 싫단다. 오로지 계속 일하고 싶다. 연구도 재충전도 일을 하면서 해야 제대로 된다. 염정아는 움직이면서 생각한다. 아니 움직여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생각에 잠겨 잇몸이 해져라 칫솔질을 해대는 서인경의 모습은 염정아 그대로다. 뭔가 골똘히 생각할라치면 구석에서 턱을 괴는 것이 아니라 덜그럭덜그럭 그릇을 닦거나 머리라도 감아야 하는 여자, 극도의 산만함 속에서만 평형을 찾아내는 그녀는 천생 도시 여자이며 조건 유리한 배우다.

“나는 손이 움직여야 생각이 돼요. 혼자서도 너무 잘 놀아요. 혼자 있어도 왜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어요. 거울 보면서 온갖 포즈를 취하고 청소하고. 동생이 베트남 국숫집을 냈는데 머리 복잡할 때면, 내가 가서 설거지만 해주면 안 될까 조르기도 했다니까요. 그래서 가족들이 내가 할 집안일을 안 남겨두면 조금 서운해요. (…) 그래서 다음 일이요? 아주 독한 걸 하나 하고 그 다음에 멜로드라마를 할까 예상했는데, 요즘 제 마음 상태가 자꾸 여성스러운 쪽으로 가네요. 그러면 그걸 따라야 하겠죠? 그렇겠죠?”

질문처럼 들렸지만 그녀는 그다지 대답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염정아의 시선은 이미 거울 속의 자신한테 꽂혀 있었다. 누가 뭐라고 답하건 이제 그녀는 1에서 6까지 가능성을 품고 보드 위를 구르는 주사위처럼 카메라 앞에 거듭거듭 몸을 던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도 이제 제로는 없어!”라고 그 팽팽한 인중으로 도도히 흥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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