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해상화> <밀레니엄 맘보> 촬영감독 마크 리핑빙
2004-11-11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촬영은 감독의 사유세계로 들어가는 것”

130분의 러닝타임을 38개의 숏으로 채운 <해상화>의 첫숏 혹은 첫신.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을 소개하는 그 자리에서 카메라는 끊임없이 서성거린다. 말하는 사람을 보여주지도 않고 듣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 그 모호한 시선은, 돌이켜보면 유령의 것처럼 아득했다. 그 시선의 주인이었던 촬영감독 마크 리핑빙은 이 현장이 일종의 오케스트라와도 같았다고 회고한다. 정해진 것은 연주자들의 악기와 악보. 그나마 악보에 표시된 것은 대략적인 코드와 주가 되는 멜로디 정도로 속도와 강세, 타이밍 등 모든 디테일은 즉석에서 결정된다. “리허설은 없다. 정해진 것은 그 테이크의 주제와 배우들의 대강의 동선이다. 감독은 뒤에서 즉흥적으로 현장을 지휘하는데, 때로 배우들을 갑자기 프레임 안에 투입하기도 한다. 나는 감독의 지휘를 곁눈질하면서 어떻게 찍을 것인지를 생각했고, 분위기에 따라 카메라와 인물, 인물과 인물의 거리를 결정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저 기다려야 했다는 점이다.”

영화의 모든 최종 결정은 감독의 몫이지만, 그 감독의 결정은 촬영감독의 비주얼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10월30일 제2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진행된 마크 리핑빙의 마스터 클래스는 지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있었던 허우샤오시엔의 마스터 클래스가 미처 채워주지 못한 중요한 조각을 완성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아시아영화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동년왕사> <희몽인생> <해상화> <밀레니엄 맘보> 등 허우샤오시엔의 영화 대부분을 촬영했고, 허안화(<여인사십>), 티엔주앙주앙(<작은 마을의 봄>), 트란 안 훙(<여름의 수직선에서>), 그리고 홍콩의 숱한 상업영화 감독과 호흡을 맞춰왔다. 왕성한 식욕을 가진 미식가처럼 아시아 각국의 감독들과 다양한 실험을 함께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촬영자로서의 미래를 결정지은 것은 대만의 뉴웨이브였다고 말한다. “27년 전 영화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동료들이 새로운 영화를 찍기 시작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들과 함께한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나만의 색을 찾게 됐다.”

매번 A4 10장 이내에 담긴 시나리오를 전해줄 뿐인 허우샤오시엔의 작업 스타일 덕분에 그는, 매 신에 담으려는 감독의 의도를 대화를 통해 파악하고, 한 장면에 압축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해상화>를 찍을 당시에는 감독과 둘이서 현장의 테이블이며 창문, 소품을 하나씩 닦으면서 그날 촬영의 포인트를 의논했다. 언뜻 들으면 굉장히 평화롭게 들리지만, 허우샤오시엔은 언제나 “스탭들을 벼랑 끝에 몰아놓고,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살아남을 것을 주문하는 감독”이었다고. 촬영자에게 연출자로서의 시각까지 요구하는 그 힘겨운 작업을 함께해왔다면, 이제는 그 자신의 낙인을 완벽하게 찍을 수 있는 연출에 대한 욕심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욕망은 이름을 알리는 낙인에 있지 않다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촬영감독은 매번 감독의 사유세계로 들어간다. 감독은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로선 단 하나의 공간이 너무 단조롭게 느껴진다. 서로 다른 감독들의 세계를 함께 고민하면서 매번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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