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다시 시작한 지 꼭 1년 만이다. 김민정은 지난해 5월, 드라마 <술의 나라> 촬영 이후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브라운관에 얼굴을 내민 뒤 14년 동안 연기생활을 하면서 딴 생각 한번 안 했던 그가, 도대체 왜? “아마 죽을 때까지 그토록 값진 시간이 다시 올지는 모르겠어요”라고 운을 뗄 정도면, 단순한 휴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가 원래 제 살 깎아먹는 스타일이에요. 작품 들어가면 제 분량 없는 날엔 방 안에만 있어요. 감정 흐트러질까봐 친한 친구한테 전화도 안 해요. 그렇게 했는데 반응이 안 좋으면 또 왜 그것밖에 못했지 괴롭혀요. 다음에 잘하면 되지, 이 말이 스스로에게 안 나와요. 오죽했으면 머리가 다 빠졌겠어요.”
잠수 끝에 김민정이 내린 결론은 “즐기면서 일하자”였다. 그때서야 부담 털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밀린 시나리오를 들출 수 있었다. “김민정은 여우다, 깍쟁이다, 말붙이기조차 어렵다더라, 뭐 이런 세간의 평들을 좀 깨보고 싶었어요. 제가 보면 털털한 면도 있고, 중성적인 면도 있으니까. 근데 어떤 캐릭터로 그걸 보여줄지는 막막한 거예요.” “언젠가 꼭 같이 해보고 싶던” 변영주 감독과의 대면은 마침, 단비였다. “보통 감독님들하고 만나면 마무리는 시시껄렁한 잡담이 되게 마련이거든요. 근데 변 감독님은 앉자마자 수진은 니가 해야 한다며, 수진의 표정이 제게 있다며, 어렸을 때 제가 출연했던 작품들까지 줄줄이 꿰요. 나중엔 진로 상담까지 해주시는데, 그때는 신처럼 보이더라니까요.”
<발레교습소>의 수진은 세상을 안다고 말하지만, 몸으로는 겪지 못한 고3 수험생. 강아지도 곁에 두지 못하면서 난데없이 제주도에 있는 대학 수의학과에 가겠다고 해서 집안을 발칵 뒤집는다. 수능시험을 치른 뒤에 선머슴 같은 딸의 성격을 개조하겠다고 팔 걷어붙인 엄마에 의해 발레교습소에 들어가게 된 수진은 그곳에서 “하기 싫은 것은 많으나 하고 싶은 것은 없는” 또래 민재 일행과 만나게 되고, 그들과 함께 스무살 문턱을 힘겹게 넘는 인물이다. “어른인 척하지만 수진은 사실 애예요. 수진의 매력은 그거예요. 애는 애구나 느껴졌을 때, 귀여움이 느껴져요.”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곰삭은 말투로 고백하는 김민정을 보고 있노라면, 힘든 성인식을 치러낸 영화 속 수진 같다.
<버스, 정류장> 이후 영화는 <발레교습소>가 두 번째, 2년 만이다. 긴장의 족쇄를 풀었다지만 “10년 동안 몸에 밴” 불안이 촬영 도중 엄습하지 않았을 리 없다. “제 분량 촬영 일정이 지체되는 일이 잦았는데. 감정 잇기가 불안하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감독님이 고민할 때마다 문자메시지로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주시던데요.” “탁 던져놓고 니가 찾아봐” 하는 변 감독의 연출 방식에 주파수를 맞추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는 그는 몇번의 촬영 끝에 “던진 질문에 답이 있다”는 걸 알아냈고, 동시에 불안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메이크업도 안 하고 그냥 갔어요. 근데 어쩔 수 없나봐요. 수진 발레복 고르는 데 보라색에 손이 가더라니까요. 감독님이 칙칙한 검은색 발레복으로 교체하셨지만.” (웃음)
촬영현장에서 김민정의 별명은 ‘아줌마’였다. 썰렁한 농담에도 크게 웃어젖히는 바람에 얻은 또 하나의 이름. “전엔 다들 ‘민정씨’ 했는데 이번엔 다 ‘민정아’ 하던데요.” 키를 낮추면 또 다른 배려도 보이는 건가. 나이는 4살 오빠지만, 연기 경력은 새까만 후배인 윤계상과의 호흡을 위해 그가 준비한 건 단 하나. “편하게 해주자!” 윤계상의 현장 별명은 약수터 아저씨였던 데는 그의 천생도 있지만, 김민정의 배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쟤네 배우 맞냐?”는 핀잔을 들었을까. 두 사람이 같이 나오는 장면에선 숙제 같이 하는 꼬맹이들처럼 연신 머리를 맞대고 풀어냈다는데, 유독 한 장면, 키스신만은 예외였다. “둘 다 엄청 긴장했어요. 리허설을 그렇게 했는데도 슛 들어가니까 고개 못 맞춰서 NG, 상대 감정 끊어서 NG.” (웃음)
문제의 키스장면 촬영 뒤 윤계상의 까칠한 수염 때문에 입 주위가 빨갛게 부어올라서 병원에 다녀야 했다는 김민정은 영화 촬영 뒤 찍은 드라마 <아일랜드>에 출연하면서 이미 네티즌들의 시선을 모아놓은 상태. 욕을 입에 주렁주렁 달고 사는 에로배우 한시연으로 “달라졌다”는 찬사를 듣고 있는 그는 관객에게 곧 보여질 <발레교습소>에 대해선 “보충촬영이 없어 아쉬웠다”는 우스개로 만족감을 표시한다. “이젠 우울모드에서 좀 벗어나려고요. 더 밝게 해보고 싶어요. 코미디나 멜로나 좀 분명한 장르영화들에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