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쉘 위 댄스>의 두 아저씨
2004-11-19
글 : 정이현 (소설가)
춤에 충실한 스기야마, 가족에 충실한 존, 외로운 욕망 다른 종착점

아저씨는 외롭다. 그래서 춤춘다. 여기 춤추는 두 아저씨가 있다. 일본 아저씨 ‘스기야마 상’과, 미국 아저씨 ‘미스터 존 클러크’. 남 보기는 멀쩡하지만 실은 이유 없이 공허한 내면을 일상생활 속에 숨기고 있다는 것까지 두 남자의 공통점은 무궁무진하다. 한쪽이 한쪽을 리메이크했으므로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들이 겪는 사건도 꼭 닮아 있다. 출퇴근길 전철의 창 너머로 댄스 교습소의 여자를 발견한다. 그 여자는 댄스교습소의 강사. 어설픈 짝사랑은 곧 건전하게도! 춤 그 자체에 대한 열정으로 전이된다. 아니, 그 대상이 꼭 춤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아저씨는 한국영화 <반칙왕>의 소심한 은행원 송강호의 경우처럼 프로레슬링에 빠지기도 하고, 또 다른 아저씨는 조기축구회의 열혈 회원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스기야마와 존은 왜 하필 사교댄스의 세계를 택했을까. 춤은, 몸으로 직접적인 내적 정서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또한 육체를 이용하여 이루어지는 타인과의 교감이다. 이 소통을 통해 그 아저씨들은 제 안의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사교댄스는 엄격한 규율을 가진 장르다. 그 세계에는 절제와 존중, 배려가 있다. 원 스탭, 투 스탭… 걸음마부터 차근차근 익히는 동안, 자신을 둘러싼 외피를 잠시 잊고, 진짜 ‘나’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아직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만의 방’은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직장과 가족이라는 굴레와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고픈, 바로 그것이 욕망의 동력이었다.

하지만 누가 미국 중산층 가정의 자상한 아버지 아니랄까봐 존은, 영화의 뒷부분에서 스기야마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행태를 보인다. 경연대회에서 함께 춤추던 여성파트너의 치마를 밟아 위기에 처한 순간. 스기야마는 사교댄스의 원칙에 따라 끝까지 파트너를 보호하려 애쓰지만, 존은 다르다. 세상에! 그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곤경에 처한 파트너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가족의 오해를 풀기 위해 밖으로 달려 나간다. 서양남자들의 매너가 훌륭하다는 것은 죄다 헛소문이었나 보다. 아니면 그 신사도는 오직 ‘내 가정’과 ‘내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만 발휘되는 것인가 보다. 스기야마는 춤의 윤리에 충실했고, 존은 가족의 윤리에 충실했다. 미국판 <쉘위댄스>에서 중년을 맞은 한 인간의 ‘자아 찾기’는 결국 부부클리닉의 차원으로 축소되었다. 턱시도를 쫙 빼입은 존이 등 뒤에 장미꽃을 숨긴 채 아내의 회사를 방문하는 장면은, 부시 재선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는 미국 중산층 가족이데올로기의 저 기막힌 힘을 직접 목도하게 해주는 ‘명(?)장면’ 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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