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콩가루 집안 배다른 네 부자 이야기, <귀여워>
2004-11-23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우리가 언제부터 부자(父者)지간이었더냐. 길에서 주워온 여자 순이 앞에서 무너져내린 네 부자 이야기.

<귀여워>는 두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늘어진 뱃살 아래 팬티 한장만 입고 철거민들을 두드겨패는 깡패와 아이를 점지받으러 온 여인을 낡은 아파트 복도 벽에 세워놓고 손수 씨를 뿌려주는 박수무당. 그리고 사정에 이른 무당의 신음소리와 함께 타이틀이 떠오른다. 귀여워. 누구도 이 남자들을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 타이틀을 소리내어 읽어주는 한 여자만은 진심인 듯, 깨물어주고 싶다는 목소리로 “귀여워”라고 말한다. 그 여자 순이 덕분에, 깡패와 박수무당과 다른 두 남자는 정말 귀여운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한때 아이 점지에 용하다고 소문났던 무당 장수로(장선우)는 쓰러져가는 아파트에서 배다른 두 아들과 살고 있다. 큰아들 후까시(김석훈)는 <본 투 킬>에서 정우성이 탔던 오토바이 V맥스를 타고 세상이 한점으로 모일 때까지 달려보는 게 소원인 퀵서비스맨이다. 후까시보다 조금 늦게 아버지를 찾아온 탓에 둘째가 된 개코(선우)는 건달기가 농후한 견인차 운전기사다. 장수로와 후까시가 마주앉아 김치 담그는 모습을 지켜보던 개코는 “아빠, 여자나 하나 주워다줄까?”라고 농담을 하고, 정말 도로에서 뻥튀기를 파는 순이(예지원)를 주워다준다. 빨간 가방을 메고, 여신처럼, 철거촌에 내려앉은 순이. 그녀가 나타나면서 세 남자가 사는 아파트에 성적인 긴장과 질투가 뒤섞인 기묘한 생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한명이 더 남아 있다. 철거깡패 뭐시기(정재영)는 아파트에 남은 주민들을 쫓아내러 왔다가 수로가 집나간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피는 속일 수가 없어서, 뭐시기 또한 순이에게 이끌린다.

<귀여워>는 다섯명의 캐릭터와 황학동이라는 공간이 끌고가는 영화다. 장수로와 세 아들이 가지고 있는, 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사연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하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소망에 설렜던 사이비 교주 장수로는 어쩌다 철거촌으로 흘러들어와 오지 않는 신(神)을 기다리게 되었을까. 십년 전 상경해 철거깡패로 일하면서 “서울의 반을 일군” 뭐시기는 홀로 어떤 시간을 겪었을까.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도 없는 <귀여워>는 이들을 하나하나 탐구하는 대신 좁은 아파트 안으로 불러들여 순이라는 혼돈의 중심을 둘러싸도록 만들었다. 이들에게 순이는 신기루와도 같다. 사막을 건너서라도 갖고 싶지만, 사막을 끝까지 건넌다 해도 닿을 수 없는 존재. 무엇을 소망하는지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환상. 그래서 후까시는 순이와 열정적으로 섹스한 뒤에 처녀막이 터진 핏자국을 발견하는 상상을 하고, 개코는 차라리 순이를 사창가에 팔아버리고, 뭐시기는 아버지의 여자라고 믿는 순이에게 가슴을 만져도 괜찮은지 묻는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이는 이처럼 남자들이 움직이도록 불을 지피는 연료가 된다.

이 영화로 데뷔한 김수현 감독은, 오랜 준비기간을 고려한다 해도, 신인으로서는 놀라운 균형감각을 가지고 이 귀여운 캐릭터들을 한품에 끌어안았다. 순이는 후까시의 오토바이에서 개코의 견인차로, 장수로의 이부자리로, 뭐시기의 아지트로, 정령처럼 떠다니고, 그 가벼운 발걸음을 따라 사연이 생겨난다. 순이는 고정된 축이 아니다. 붙잡아놓고 차근하게 들여다볼 수 없는 순이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린다. 그러나 김수현 감독은 예측 불가능한 그녀를 통해 역시 예측 불가능한 네 남자를 순식간에 꿰뚫고 물러나는 쾌감을 전해준다. 부자가 한 여자와 관계를 맺고자 다툰다는, 신문 사회면에나 실릴 법한 통속극이, 섹스에 몸이 달아오른 네 남자의 에너지 넘치는 소동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동은 무엇이 되었든 새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붙잡는 기회로 작용한다. 순이가 장수로가 남긴 부적을 불태울 때, 작은 불똥은 서울의 네온사인이 모두 터져나오는 불꽃이 되어,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린다.

캐릭터가 분명한 <귀여워>는 그만큼 배우들이 차지하는 몫이 클 수밖에 없다. 김수현 감독을 연출부로 거느렸던 인연 때문에 이 영화에 출연한 장선우 감독은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기이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그의 실제 캐릭터와 맞물려, 기이한 재미를 주기도 한다. 불쑥 튀어나오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예지원과 툭툭 던지는 대사가 절묘한, 남성듀오 미스터 투 출신의 선우도 놀라운 캐스팅. 그러나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정재영의 연기는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다. 그는 이 영화가 난처해지거나 머뭇거릴 때마다 약간 길게 끄는 듯한 발음까지 살린 전라도 사투리로 웃음을 끌어내지만, 이전의 코미디 연기와는 달리 관객이 웃어주길 기대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페이스를 지킨다. 어쩌면 <귀여워>의 인물들은 모두 의연한지도 모르겠다. 타고난 그대로 행동하는 장수로와 세 아들과 순이는 판타지가 아닐까 싶을 만큼 낯선 생기로 이 영화를 채워간다. 순이는 장수로에게 “즐거웠어. 모두 나를 좋아하고, 나에 대해 묻지도 않고”라고 말한다. 이해할 수 없는 다섯명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눈에 보이는 순간에만 민감해질 때, <귀여워>는 귀여운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장수로 역의 배우 장선우 인터뷰

“협박을 하기에 할 수 없이 출연 승낙했다”

장수로를 연기하는 입장이 되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그전과 느낌이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처음에는 발칙하다, 많이 노는 영화구나, 싶었다. 신선하고 좋았다. 그런데 내가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장수로 대사가 말도 안 되고 너무 망가지는 거다. 몇번을 못한다고 했다. 제발 정신차리라고 했는데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웃음) 마지막엔 협박을 하기에 할 수 없이 승낙했다. 처음엔 대사도 아닌 것 같아 테이크를 몇번이나 갔다. 장수로가 순이한테 아들 낳은 사연을 들려주는 장면은 여섯번이나 찍었는데 영화에는 안 들어갔고, “연꽃은 연못이 썩었다고 불평하지 않아”라는 짧은 대사도 몇번을 다시 했다. 서너번 정도 촬영한 다음에 대사 좀 고치면 안 되냐고 했더니 들은 척도 안 하더라. (웃음) 하다보니 말 안 되는 대사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연기를 잘했다 싶은 장면이 있나.

몇개 빼고는 다. (웃음) 장수로가 순이하고 케이블카에서 데이트하는 장면은 소음 때문에 후시녹음을 했다. 못할 것 같았는데, 정말 현장에서 하는 것처럼 했다. 와, 내가 배우구나, 이러면서 좋아했다. 먹고살려니까 다 되더라고. (웃음) 장수로가 순이를 집적거리는 뭐시기한테 대놓고 뭐라고는 못하고 물 많이 쓴다고 타박하는 장면도 참 재미있었다.

말 잘 듣는 배우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정말인가.

딱 한번 빼고는 정말 감독 말을 잘 들었다. 촬영 끝난 줄 알았는데 한 장면 더 찍자고 하기에 필요없는 장면 아니냐고 했다. 장수로가 뭐시기 집에서 괴나리봇짐 들고 도망나오는 장면. 결국 그 장면은 없어졌다. 금방 후회했다. 끝까지 말 잘 들을걸 하고.

얼마 전에 신작 <천개의 고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들었다.

나는 시나리오를 많이 고치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5고까지 썼다. 일단 몽골 현장을 잘 모르고, 아이들이 보는 영화이다보니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 자문도 많이 구했다. 전세계 어린이들을 다 울리는 영화가 될 텐데…. (웃음) 아직은 목표일 뿐이다. 생각대로 진행된다면 올해 겨울엔 몽골에 가서 혹독한 추위를 친구 삼아 지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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