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고고학자이자 탐험가인 라라 크로프트(안젤리나 졸리)는 아버지 크로프트경(존 보이트)의 유품 속에서 이상한 시계를 발견한다. 이 시계는 시간을 통제하는 고대의 신비한 석판 ‘빛의 트라이앵글’로 통하는 열쇠. 행성이 일렬로 배열돼 트라이앵글의 힘이 절정에 이르는 5천년 만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주의 운명을 장악하려는 비밀결사 ‘광명파’에게 시계를 도둑맞은 라라는, 지구 양끝에 숨겨진 조각난 트라이앵글을 먼저 찾아 세계를 구하고 죽은 아버지와 재회하기 위해 캄보디아와 베니스, 극지대를 차례로 방문하는 장도에 오른다.
■ Review
<툼 레이더>는 수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영화의 시동을 건다. 발코니에 서서 바람이라도 쐬는 듯 한가로운 표정을 한 안젤리나 졸리의 옆얼굴이 보이는가 싶으면 카메라가 빙그르르 돌고, 관객은 라라가 실은 어딘가에 거꾸로 매달린 고난도의 포즈를 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감탄할 사이도 없이 라라는 죽기살기로 달려드는 로봇의 ‘내장’을 신나게 뜯고 내동댕이친다. 구구한 소개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는 투다. 알고보면 이 살벌한 시퀀스는 ‘연습 모드’. 그리고는 이내 졸리의 조각 같은 몸매가 PG-13등급의 카메라 앵글을 희롱하는 샤워신이 뒤풀이처럼 이어진다.
도입부가 요약하듯 <툼 레이더>의 라라는 매사가 이런 식이다. 중력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적수와 장애도 라라의 스타일을 구기지 못한다. 안젤리나 졸리는 <토요일 밤의 열기>의 존 트래볼타처럼, 의 미녀들처럼 계산된 보폭으로, 계산된 올 수의 앞머리를 휘날리며 영화 속을 폼나게 활보하고 활강한다. 이 고귀한 혈통의 부유하고 섹시한 여성판 인디애나 존스는, 팔 여섯 달린 움직이는 석상을 가볍게 때려눕히고, 올림픽 다이빙 선수처럼 폭포에서 몸을 날리며, 캄보디아 사원의 승려나 원주민 소녀들과 그들의 언어로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썰매 끄는 시베리안 허스키종 개들과도 척척 호흡을 맞추기도 한다. 라라가 지닌 이같은 고수의 여유와 차원 다른 무공이 어울려 빚어내는 초현실적 멋은, 그녀가 잠자리 체조 삼아 바흐의 피아노 협주곡을 틀어놓고 번지점프 줄에 매달려 벌이는 공중곡예장면에서 아찔한 정점에 달한다. 그런가 하면 이 장면은 영화 <툼 레이더>가 너무 일찍 맞이한 절정이기도 하다. 최근 액션영화들이 다 그렇듯 <툼 레이더>에서도 벽과 천장, 바닥의 구분은 거의 의미를 상실한다.
주인공 라라는 이력서에 따르면 영국 상류사회를 떠나 혼자 여행할 때만 삶의 참맛을 느끼는 타고난 방랑자라지만, 영화 <툼 레이더>는 라라가 크로프트저택에 머무는 동안 가장 생기있다. 액션만 놓고 봐도 예의 공중곡예에 이어지는 악당들의 크로프트저택 습격 시퀀스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대목. 한편 영국 문화재관리공단이 보살필 법한 광활한 저택에서 <배트맨>의 집사 알프레드를 닮은 살림 도우미와 전형적인 컴퓨터 천재 타입의 기술 도우미를 거느리고 말괄량이 공주처럼 살아가는 라라의 생활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온갖 가재도구가 구비된 바비인형의 예쁜 집을 엿보는 아기자기한 재미까지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어드벤처의 주인공으로 태어난 만큼 라라는 떠나야만 한다. 모험의 목표는 5천년 만에 가공할 위력을 발할 ‘빛의 트라이앵글’이지만, 그거야 제5원소가 됐건 건축무한육면각체가 됐건 별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여행의 출발과 함께 영화는 멀미를 시작한다. 스토리텔링의 기교를 고민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은 탓인지 막판의 재편집이 거칠었던 탓인지 시간과 우주를 장악하려는 비밀결사, 라라의 옛 남자친구, 유명을 달리한 라라의 아버지가 연루된 플롯은 전혀 정교하거나 조밀한 편이 아닌데도 따라가기가 수월치 않다. 런던에서, 캄보디아로 다시 베니스에서 시베리아로 어지럽게 바뀌는 영화의 공간 속에서 각 캐릭터들의 동선이 명료하게 잡히지 않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둘째로는 라라를 중심으로 내적 플롯을 이루는 아버지와 라라, 라라와 옛 애인 사이의 심리적 고리가 너무 상투적이거나 너무 허술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폭발과 반전의 쾌감이 약화된 <툼 레이더>는 차례로 스테이지를 바꾸어갈 뿐, 레벨이 높아지는 흥분은 안겨주지 못한다.
안젤리나 졸리의 카리스마에서 잠깐 눈을 돌려보면, 전투 시퀀스의 기술적 연출도 미진한 편. 거대한 기계장치나 괴물을 프레임 안에 들여놓고도 촬영과 편집은 인물의 거리감이나 동선의 교차를 정밀하고 명확하게 전달함으로써 일으킬 수 있는 서스펜스와 쾌감을 번번이 놓친다. 라라는 지나치게 탁월한 전사인 까닭에 흔들리는 오벨리스크 위에 서 있다 해도 긴장을 자아내지 못하고, 옛날 모험영화에서 빌려온 듯한 움직이는 석상들은 생김새만 고풍스러운 것이 아니라 전력도 구형이다. 여기에는 좁은 운신의 폭을 고려하더라도 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악역 캐릭터의 부진도 일조한다. <툼 레이더>의 게임 디자이너들은 파라마운트쪽에 전적으로 영화의 조이스틱을 맡겼다지만, 결국 <모탈 컴뱃> 등 예전 게임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는 우수한 각색물을 내놓겠다는 <툼 레이더>의 약속이 흡족하게 지켜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툼 레이더>는 원작 게임이 그랬듯 주인공 이외의 요소는 모조리 들러리의 팔자를 감내해야 하는 영화다. 관능미와 박력에 도도한 조롱의 표정까지 머금은 입술과 가슴, 땋아내린 머리채와 허벅지. 안젤리나 졸리의 육체를 구성하는 크고 작은 기막힌 커브들은, 어떤 <툼 레이더> 영화가 나온들 그녀만한 라라를 찾기 힘들 것이라는 예감을 품게 한다. <툼 레이더>의 실수는, 주인공 라라에게 모든 조명을 집중한 데에 있다기보다, 게임을 3차원의 살아 숨쉬는 여성에게 옮겨올 때 의당 욕심낼 만한 입체감과 생동감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데에 있다. 캣 우먼의 폭발적인 섹시함 속에는 풍만한 몸매와 붙는 의상 너머의 무엇이 있었다. 현지 소식대로 크로프트저택의 가구를 고이 보관해둘 만큼 파라마운트가 속편을 확실히 염두에 두었다면, 두고두고 일용할 양식인 캐릭터에 좀더 애정을 쏟는 것도 나쁜 투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게임 <툼 레이더>
액션어드벤처의 신천지
물론 이런 차별화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라라 크로프트’라는 캐릭터가 게임 속에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반쯤 깡패들인 일반적인 액션게임 주인공과 달리 고고학 박사 수준의 지성, 동양에서 깨닳음을 얻었다는 신비함, 귀족의 딸이라는 고귀한 이미지는 라라라는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이 요소들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건 도움만을 바라는 기존 여성 캐릭터와 달리 라라가 보여주는 ‘당당함’과 ‘자신감’ 때문이다. 수십명 남자 악당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며 쏘아대는 쌍권총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게이머들도 많다.
매년 시리즈의 속편이 나와 현재 5편까지 출시되어 있고, 옛날 버전은 ‘골드’라고 이름붙여 다시 출시되고 있다. 2편을 정점으로 인기가 떨어지면서 ‘라라’를 벗기려고 하는 제작사의 모습은 꼴보기 싫지만 그래도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어드벤처를 개척한 <툼 레이더>의 의의는 게임사에 있어선 퇴색되지 않을 거다.